가만히 잇세이를 바라만 보고 있다가 문득 너라면 저런 웃기지도 않은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했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너라면, 다른 아닌 너라면.
눈앞에 이지러지는 보랏빛을 삼키고 손안의 컵을 감싸 쥐는 손끝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 넘실거리는 게 짜증났다.
*
기침을 토해내는 잇세이를 제외하고 우리 사이에 침묵이 돌았다. 가만히 그를 바라만 보고 있는 세 쌍의 시선을 따라 나도 함께 하고 있던 순간에. 갑자기 치고 올라온 기억 하나에 불쾌한 느낌이 뱃속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더는 못 먹겠지.
낮게 내리깐 시선에 두어 개 집어 먹은 감자튀김이 보였다. 쉐이크도 더 마시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서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숨을 삼켰다.
때마침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던 기침 소리가 사그라들었다.
"왜. 큽, 날 본거야. 하나마키."
"아니 반사적으로…?"
"─거기다 하나까지."
"아. 난 얘가 네 눈치 보길래."
샐쭉이 웃어 보이니 마주친 눈이 은근히 흔들렸다. 잇세이는 너무 상냥해, 작게 삐죽인 입술에 튀어나갈 뻔한 소리와 함께 다시 안으로 말아 넣으면서. 너 때문이라 하나마키의 옆구리를 찔렀다.
찰나의 순간 터질 뻔한 소리를 참아낸 것에 잘했다는 듯 허벅지 위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그대로 바닐라 쉐이크를 스윽 밀어버렸다. 살짝 곁눈질한 얼굴은 멀쩡했지만 그 속내는 아닌 듯싶었다. 머리칼 사이로 가려진 귓볼이 조금 불그스름해서 불쑥 장난기가 고개를 내밀었지만 어영부영 삼켜내려 했다. 하지만 자꾸만 이쪽은 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잇세이만 꿋꿋하게 바라보는 옆모습에 어쩐지, 짓궂은 마음이 불쑥 튀어 오른다. 가져왔던 손을 다시 그의 허벅지 위에 얹었다. 탄탄한 근육질의 허벅지를 쓸어내리고 손끝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문지르니 슥 내려온 손이 더 이상 장난을 치지 못하게 잡아 눌렀다. 살짝 흔들어 보았지만 더욱 꽉 잡아 그냥 허벅지 위에 누르고만 있는 것에 흥이 떨어졌다.
잇세이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녀석에게 쥐어준 손 하나를 잊은 채로. 남은 손으로 턱을 되었다. 창밖의 거리를 가득 눈에 담아내니 어쩐지 눈이 부시다. 반짝반짝, 시내라고 시위라도 하듯 제법 불빛들이 화려했다. 차라거나 간판이라거나 네온사인이라거나. 가늘게 눈을 뜬 채로 턱을 괸 손끝으로 뺨을 두드렸다.
어느새 잇세이와 녀석이 어물어물 대답을 한 모양인지, 옆에서 나를 무시하고 얘기가 오가는 것이 들렸지만 끼어들진 않았다. 나와 관계있는 것은 오직 잇세이와 하나마키 뿐이었다. 그 둘이 직접적으로 나를 끌어들이지 않는 한 내가 포함된 이야기라 할지라도 친구들 간의 얘기에 끼어드는 몰상식한 애가 되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남자애들 시선에 목매는 타입은 아닌지라.
"그럼 맛층이랑 쟤는 무슨 사이인데?"
슬슬 움직여야하지 않을까 고민될 시간언저리에 닿았을 때에. 여우 웃음이 나와 잇세이의 사이를 찔렀다. 느릿한 몸짓으로 창밖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잇세이 네로 돌렸다.
조금 얼굴이 굳은 녀석을 지나쳐 잇세이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시선을 빗겨내니 그 뒤에 있던 우직한 느낌의 흑발 소년이 있었고 그 바로 뒤에 어깨동무를 한 채로 매달린 여우웃음 소년이 히죽거리고 있었다.
마치 떠보듯 웃는 모습이 고까웠지만 삼켰다.
녀석이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것을 거두어 턱 밑에서 손끼리 가볍게 깍지껴 늘어뜨린 채로 그 위에 턱을 얹었다. 미묘한 온기가 간질간질, 또 다시- 눈앞에 보랏빛의 잔상이 이지러졌다. 외면했다.
여우 웃음과- 눈이 마주쳤다.
"남매야."
살풋 눈꼬리를 휘며 웃기까지. 무슨 생각을 했던가. 아아. 하나마키면 모를까 잇세이의 친구들에게 사납게 굴면 안 된다, 였던가. 근데 이미 녀석도 저들의 친구잖아? 아아, 모르겠다. 단지 잇세이의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에 만족스런 답이겠거니 생각할 뿐.
우리 사이에 침묵이 돌았다.
나이가 제법 있다는 말은 무의미하게 흘린 시간, 혹은 의미 있게 흘린 시간이 제법 있다는 것으로 녀석들은 그 이상으로 말을 끌어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와 잇세이의 다른 성을 지적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외향도. 제법 눈치가 있으려니 이혼, 혹은 배다른 남매 정도란 것을 알고 있겠지. 아, 후자의 경우는 상상하기 힘드려나. 어쨌든 우리는 나이가 동갑이고 하니까.
“하나.”
“응?”
“가자, 집.”
이미 늦은 시간이라고, 내겐 편안했던 침묵을 깨고 잇세이가 말을 꺼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가기는 싫지만 잇세이가 저렇게까지 말하면 거부할 수는 없다. 그에게 걱정 끼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의 뒤에 있는 그녀에게도. 그것은 오래 전 안착한 그의 새로운 아버지의 마음을 불안히 흔드는 요소가 될 터이니. 그런 민폐는 정말 원치 않았다.
“그래.”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내 것이었다. 화면 가득 차오른 이름에 순간 잇세이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내가 껄끄러웠다. 망설이는 찰나 녀석이 핸드폰과 함께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대로 패스트푸드점의 밖에다가 떨구듯이 내모는 것에 어이가 없어 바라보니 손에 핸드폰을 쥐어주고는 방금 전 내가 앉았던 자리의 쇼윈도 앞에서 받으란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모습은 보이니 괜찮다고. 기가 막히는 개소리를 짓걸인다 쏘아붙이고는 정강이를 퍽 차곤 손안의 핸드폰을 굴렸다.
망설이는 와중에도 끊지 않는 전화에 바짝바짝 마른 입안에 혀를 굴렸다. 녀석의 손짓에 한숨을 쉬고 전화를 받았다. 쇼윈도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시끄럽게 울리는 거리의 오토바이 소리에 몸을 움츠렸다.
또 다시 보라색이 이지러졌다. 아니, 보라색, 아니 붉은색, 아니- 작은 제비꽃, 한 송이 위로 동백꽃이 겹쳤다. 눈송이가 겹쳤다.
어딘가 멀리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
보고 싶어, 네가 없는 여기는 재미가 없어. 너라도 다시 돌아와.
*
폭풍과도 같이 쏟아지는 말에 스민 물기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아니 한 순간 삼키지 못한 숨이 몰아쳤던 것도 같다. 점점- 그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발치에 무언가 차였다고 느낀 순간. 녀석이. 다가와 쏟아져 내렸다.
눈앞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