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온 이를 내쫓기엔 오리하라 릿카란 여자는 그렇게 무례한 사람이 아닌지라. 그녀는 머뭇거리지 않고 문을 열어 그를 받아들였다. 다행스럽게도 깔끔한 집임에 안도하면서 거실로 안내하고 난 후에 그녀는 머뭇거리며 마실 것을 원하느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에 금방 물건을 전하고 갈 생각이었던 타케다는 얼결에 집까지 들어오게 됐지만, 차까지 마시고 갈 정도로 염치없지는 않아 고개를 흔들었다. 서있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환자인데, 그냥 밑에 우편함에 넣어둘 것을 하고 후회 해보지만 이미 시간은 지나간 후였다. 그렇게, 서로 쇼파에 마주앉고 난 이후로 그들의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는 없었다.

 

침묵. 서로 이름만 알고 옆자리인 것까지만 알았던 것과 달리 이제 한쪽은 집 주소까지 알고 있게 된 무어라 형용하기엔 엄청 어색한 사이에서 무슨 말을 해야만 하는 걸까.

 

 

"."

 

", 저기 오리하라상. 이거, 시노 교수님께서 필수 과제라고.."

 

 

용기 있게 낸 말은 너무나 작았기에 타케다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하고 본인의 말부터 꺼내 늘어놓았다. 순간 끊긴 말에 놀랐지만, 그래도 릿카는 최대한 덤덤히 아무렇지 않은 척 엷은 미소를 머금고 그가 내민 서류봉투를 고마운 마음으로 받았다.

 

 

"고마워요, 타케다상."

 

 

종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품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저녁을 먹자는 권유는 사실 도박이었다. 반은 부디 그러길 바라는 마음, 반은 거절하길 바라는 그런 모순적인 마음을 품고 던진 도박. 그리고 타케다는 그녀의 도박성 짙은 말에 짧게 고민을 한다는 것조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가 말하지 않았다면 그가 말했을 것이라는 듯이.

 

 

"?"

 

"?"

 

"뭐야 왜 나랑 같이 저녁 먹겠다는 거야?"

 

"릿카?"

 

", 난 네가 바쁘다고 할 줄 알고 그냥 던져본 말이었단 말이야."

 

 

언제나 네 앞에 서면 마음이랑 입은 다른 말을 주절거려서 참 곤란했는데 아직까지도 이렇다니. 릿카는 순간적으로 나간 말에 입술을 손으로 덮어 가리며 데구룩, 눈을 굴렸다. 코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타케다는 작게 웃으며 남은 음료를 마저 마셨다.

 

 

"바쁠 리가 없잖아. 널 만났는데."

 

"바보."

 

 

어떻게 보면 귀엽고 어떻게 보면 어딘가 든든하게 남성스러운. 기억 속의 그와는 달리 성숙해진 그 미소에 두근, 무겁게 내려앉은 심장을 토닥이면서. 릿카는 붉어졌을 것이 뻔한 얼굴에 고개를 숙였다.

 

타케다의 작게 웃는 소리가 귓가에 달라붙었다.

 

 

달이 휘영청 뜬 10:00 pm. 친절하게 집 바로 앞까지 데려다준 타케다에 고맙다 인사를 하고 도어락을 해제한 뒤에 집에 들어선 그녀는 버릇처럼 거실의 불을 켰다가 화들짝 놀라 터지려는 비명을 두 손으로 내리 막았다.

 

 

"안녕."

 

 

그녀가 사랑하는 민트 색 쇼파가 피로 더럽혀진 것 따윈 눈앞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쇼파 위에 낯설지 않은 남자가 피칠갑을 한 채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을 확률이 몇 퍼센트나 될까요, 라 인터넷에 검색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민트 색 쇼파를 군데군데 물들이고 있는 붉은 색이 너무나 선명해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날 지경이었다.

 

그 사이에, 파묻혀서. 검은색 옷이지만 들어난 하얀 손을 질척하게 물들인 피가. , 뚝 타고 흘러 바닥을 적시는 피가. 하얗게, 그녀의 머릿속에 천천히 번져나갔다.

 

 

"이자야! 너 이게 무슨 꼬락서니야!"

 

"데이트 즐거웠어?"

 

"데이트고 나발이고 이 망할 자식아 너 왜 이리 다쳐왔어!"

 

 

마스코트나 다름없어진 털 후드로 가리고 있지만, 그 사이에 숨은 얼굴의 혈색이 좋지 않은 것 정도는 오랜 시간을 함께한 릿카, 그녀에게 별로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들고 있던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고 이자야에게 달려들어 억지로 그 후드를 벗겨낸 그녀는 파리한 안색의 그에 헛숨을 흘렸다. 숨이 막힐 정도로 기가 막힌다는 말을 이젠 이해할 수 있었다.

 

하얗게 질려가는 그 얼굴이 퍽 안쓰러워서 이자야는 그의 얼굴을 부여잡는 손길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그에 툭 떨어진 손은 마치 사시나무 떨듯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얼마간을 그렇게 멍하니 손만 떨고 초점 잃은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을까, 이자야는 슬슬 심각하게 느껴지는 상태와 그녀에 입을 달싹거리기만 할 때쯤에야. 릿카의 덜덜 떨리는 손이 절대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복부의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그녀의 안색은 더이상 하얗게 변할 수도 없을 지경까지 갔음에도 이자야처럼 파리하게 변하고 말았다.

 

 

", - 바보가-!"

 

 

왈칵 치솟는 눈물에 뻔뻔하게 뺀질거리는 웃음을 머금고 울면 못생겨진다, 그딴 식의 말을 던지는 이자야에 릿카는 세게 말아 쥔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내리쳤다. 고통에 탄식하던 알게 무엇이냐, 어쨌든 그녀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를 치료하는 일인데.

 

 

", 정신 놓지 말고 있어!"

 

 

망할 놈, 바보 자식, 멍게, 해삼. 그 이상의 모든 욕까지 다 퍼부어가며 이자야의 후드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낸 릿카는 익숙하게 복잡한 패턴을 풀고 전화번호부를 뒤적였다. 옆에서 패턴을 바꿔야겠다, 중얼거리는 이자야는 이미 아웃 오브 안중. 그녀는 익숙한 이름을 찾았음에 꾸욱,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라!"

 

 

본의 아니게 사촌때문에 익숙해졌던 오랜 지기를 부르면서. 그녀는 핑 도는 눈물을 억지로 닦아냈다. 이자야의 피가 묻은 손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녀의 눈가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이자야가, 우자야 이 바보가-!"

 

 

시부야에 있었다면, 아니 이케부쿠로에 있었다면. 그랬다면 세르티 덕으로 신라의 도움을 빨리 받을 수 있을지 몰랐지만, 여기는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한시간은 족히 걸리는 미야기현. 이자야를 치료해줄 신라가 있는 곳과 거리가 멀었다. 그에 릿카는.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덜덜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 -. 알았어. . 고마워."

 

"하아. 울면 못생겨진다니까 이젠 아주 호러영화 분장수준이네."

 

"닥쳐, 우자야."

 

 

툭 끊어진 전화를 바닥에 내려두고 일어선 릿카는 한쪽에 고이 모셔둔 구급상자를 꺼내오고 마침 주방에 있던 사케를 꺼내 들고 왔다. 야매라지만 응급처치를 안하고 무작정 신라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에.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꽤 독한 사케로 손을 소독했다.

 

 

"나중에 이 사케 값 청구할거야."

 

"아주 비싼 걸로 사줄 테니까 걱정 하지 마. 싸구려 먹지는 말고."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불안정하다. 그녀는 이자야의 입에 손수건을 여러 번 접어 두툼하게 만든 것을 물려줬다. 아주 오랜만에 쥔 메스에 손이 다 떨렸지만, 그녀는 망설일 수 없었다.

 

 

"정말 기분 좋게 데이트했는데, 이게 뭐야. 피칠갑으로 하루를 끝내게 하다니. 망할 우자야 같으니라고."

 

 

입에 물린 손수건 때문에 말하기가 힘든 이자야는 그저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마취도 하지 않은 피부를 찔러 가르는 감촉이 생생하게 머리까지 도달하는 것이 영 달갑지가 않다. 말아 쥔 주먹 사이로 고통이 스며들었지만, 그보다 더한 고통이 있었기에 그는 그저 입에 물린 손수건을 꽉 깨물 뿐이었다.

 

휘영청 뜬 달이 요염하게 달빛을 흘리는 그 밤은 그렇게 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