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네, 이런 거. 마츠가와는 저를 향해 웃는 미츠키를 보며 그 역시 피식 웃고 말았다.



하교를 끝내고 교문 앞이 아닌 조금 떨어져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한 미츠키를 찾아 가면서. 마츠가와는 어쩐지 혼자 걷는 하교길에 기분이 묘했다. 항상 시끌벅적하게 네명이서 몰려 다녔던 것이니, 유독 그 빈자리들이 허전하게 느껴지는 지도 몰랐다.



“잇세이.”



멍하니 생각하면서 걷던 찰나에 발목을 잡아채는 부름에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리면서. 그는 저에게 종종 다가와 웃는 미츠키를 보았다. 다가와 화사히 웃는 그녀는 아침과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으로 그를 반기고 있었다. 



“누, 나?”



짧은 사이에 그녀의 색이 완벽하게 바뀌어 있었다. 엷은 갈색이 따사롭고 사랑스러웠던 모습에서 붉은 색이 도드라지는 짙은 색으로 바뀌었다. 당황스러워 하는 마츠가와를 보면서 샐쭉이 웃은 미츠키는 그 앞에서 부러 빙그르 돌아 저의 머리칼을 펄럭펄럭 흔들리게 만들었다. 짙은 붉은색이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물결을 그리듯 흔들리면서 쏟아져 내렸다.



“어때, 예뻐?”



오늘 볼일이 있다고 한 거, 이거야! 환히 웃으면서 뒷짐을 지고 곱게 눈웃음을 짓는 모습에서. 마츠가와는 확실히 전의 따사로움보다는 활기참과 더불어 묘한 섹시함이 보이는 것에 미츠키, 그녀와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인정하는 것과 별개로 은근하게 따라붙는 뭇 사내들의 시선들이 거슬릴 뿐이었지만.



“예뻐. 정말 잘 어울리네. 이제, 그만 갈까?”



의아하게 올려다보는 시선에 조금 더워서, 라는 말을 흘린 그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 미츠키의 어깨를 감싸 품으로 당겼다. 새초롬하게 올린 시선이 덥다면서, 라 타박하고 있어서. 그는 그저 픽 웃으며 누나가 더 시원해, 같은 말로 살살 그녀를 구슬렸다. 


항상 제 손안에 있는 것에는 무른 그녀를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마츠가와는 훤히 알고 있었다. 다른 것에는 칼 같이 굴면서, 제 손안에만 있다는 이유 하나로 여름 햇살 아래의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륵 녹아내리는. 그녀는 퍽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서 어깨 위에 자리한 그의 팔을 내렸다. 뜻에 따라 움직이니 곧장 팔에 엉겨 붙으며 씨익 웃는 모습에 그만 마츠가와는 웃음을 터트렸다. 


새초롬한 모습으로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강아지 과였다. 



“뭐가 그렇게 웃겨?”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가 즐거우니까 웃지.”



능글맞게 웃으면서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미츠키는 마츠가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푹 찌르고는 부루퉁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손길이 다정한건 다정한거였고 마이너스의 손으로 어여쁜 머리를 헤집는 건 헤집는 것이었다.



“으윽, 누나.”


“살짝 쳐서 안 아픈거 알아. 내가 칠거 뻔히 알면서 배에 힘까지 줬더라, 너?”



흐트러진 머리를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결국엔 하나로 그러모아 올려 묶으면서. 시원해진 뒷덜미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는 걸로 머리칼 정리를 끝낸 미츠키는 개운한 마음으로 쭈욱- 기지개를 켰다. 사실 미용실에 앉아있었던 시간 자체가 길지는 않았지만 영 뻐근하게 불편한 것이, 그 미용실은 두 번 갈곳이 못되는 곳임을 새삼 깨달았다. 서비스는 나쁘지 않았지만, 말 그대로 나쁘지 않았다. 딱 그 정도랄까. 나중에 마츠가와와 지금은 도쿄에 가고 없는 린에게 미리 언질을 해주어야겠다, 다짐하면서. 그녀는 반만 몸을 돌려 손을 내밀었다.



“오늘 갈 곳 많아 잇세이. 서둘러야 한다고-?”



누나 없어졌다고 울어도 찾아주지 않을 거야. 씩, 짓궂게 웃는 것에 그게 언제 적 이야기냐며 툴툴 거리던 마츠가와는 자연스럽게 내민 그녀의 손은 잡았다. 절대 놓치지 않게 손깍지까지 껴서 떨어질 것에 대한 원천을 봉쇄한 그는 저를 바라보며 키득키득 웃는 미츠키로부터 애써 시선을 피했다. 어린 날에 있었던 일로 생긴 트라우마로 인한 버릇 중의 하나였지만, 어린 아이가 그러는 것이면 모를까 청년의 기로에 선 소년이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 잇-세이, 무서웠졍? 누나 잃어버릴까봐 무서웠졍?”


“…누나.”


“웅웅, 그래, 누나 여기 있어. 아이고 귀여워라.”


“표정 음흉해!”



어쩌라고, 나는 귀여운 모습이나 마저 볼란다. 라는, 미츠키의 즐거워 죽는 고동빛 눈동자에 마츠가와는 장렬히 침몰했다.



미츠키가 미리 말했던 것처럼 실제로 그녀는 마츠가와를 이끌고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월요일의 하교 시간이 다른 평일보다 30분 정도 일찍 끝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벌써 세시간 째를 쇼핑에 쏟아 붓고 있다는 뜻이었다.



“잇세이! 이거는?”


“놉.”



이미 십여년이란 세월 가까이 모친과 친누나, 그리고 옆집 누나인 미츠키의 쇼핑에 끌려 다녔던 마츠가와로서는 지금 이 순간 마냥 해탈하는 것이 아닌 쇼핑을 하는 당사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우선시 하는 게 중요함을 알았다. 그래서. 미츠키가 바라는 모든 리액션에 충실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단 한 번이라도 영혼리스의 리액션을 보이면 그대로 끝난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끝. 어떤 의미로든 끝. 



“그럼 이거는?”


“그 색 말고 다른 건 없어?”


“있나요?”



몇 번의 퇴짜 끝에 깐깐한 자식이라 투덜거리면서도 결국엔 마츠가와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미츠키는 포기하고 옆에 웃는 낯으로 서있는 점원을 바라봤다. 벌써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3개나 갈아입었기 때문인지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미안했지만, 미츠키는 조용히 외면했다.



“남은 건 검은색이랑 하얀색뿐입니다. 손님.”



어쩐지 앞에 망할이라고 붙어 있으면 웃긴데 현실감이 느껴져 팡하고 터져버렸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마츠가와는 유유히 하얀색 옷을 가리켰다. 미츠키는 침묵하고 얌전히 받아서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좋네. 그걸로 해.”


“남자 친구 분께서, 센스가,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렇죠?”



베시싯 웃으면서. 미츠키는 저가 입고 나온 옷으로 사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옆의 점원이 보태는 말에 부인하지 않고 그저 잘게 웃었다.



길고 길었던 쇼핑이 끝나고 네임드가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의 저녁을 즐기면서. 마츠가와는 퍽 기분 좋아보이는 미츠키의 모습에 픽 웃으며 턱을 괴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


“오랜만에 우리 잇세이랑 데이트 한 거?”


“또 남자친구 아닌데 아니라고 말 안했고.”


“어라, 그럼 너는 그 여자가 너한테서 번호따길 원했어?”



말하지, 누나가 배려했을 텐데. 히죽히죽 웃으면서 하는 말은 어쩐지 꽃다운 나이의 처자가 하고 있다고 보기엔 어색함이 있었다. 장난기 가득한 눈이라거나 정말 사심 하나 보태지 않은 누나의 마음으로 구는 그녀, 그리고 그게 익숙한 그. 둘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며 오랜만에 여운이 긴 데이트를 즐겼다. 


시간은 조금씩, 천천히. 밤이 되어가는 시간을 향해서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으아- 역시 잇세이랑 쇼핑하는 거 즐거워!”


“짐꾼이 있어서?”


“아-아니! 짐꾼보다 더 중요한 건 조언자라고! 조! 언! 자!”



내가 멋대로 쇼핑하고 나면 엄마도 그렇고 아빠도 그렇고, 너까지 전부 이게 뭐냐는 둥 어쩌네 하면서 뭐라 하잖아. 삐죽 튀어나온 입술은 서운함을 담아 삐죽삐죽. 마츠가와는 킬킬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짙은 밤 그림자에 고동색 눈동자는 검은색에 가깝게 보이고 있었지만 그녀의 머리칼은, 붉은색으로 물들인 그 색은 달빛 아래서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염색하길 잘한 것 같아.”


“응?”


“밤에 눈에 확 띄니까. 이제 반은 안심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따사로운 색도 잘 어울렸지만, 이렇게 강렬한 색도 어울린다. 무엇보다도 시야에 확 들어오니까. 요즘 들어 흉흉해진 세상에 귀가시간이 조금 늦은 그녀를 걱정하는 것은 고토네만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이웃으로서, 친구로서 같이 지내온 마츠가와네 역시 걱정하고 있었다.



“아예 안심했다고 했으면 때릴려고 했는데. 반만 안심했다니 다행이네. 어두워지면 데리러 오겠다는 소리잖아?”


“당연하지. 누난데.”



픽 웃으며 어느새 맞잡고 있던 손을 푸르고 어깨를 감싸며 품으로 끌어안는 손길에 미츠키는 꺄르륵 잔망스런 웃음을 터트렸다. 염색약 냄새가 아직 날 것이 뻔한 머리칼에 뺨을 부비는 마츠가와가 퍽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어깨를 감싸 늘어뜨린 손에 저의 손을 끼워 맞추면서. 어느새 훌쩍 커버린 그의 키나, 손에 시간의 흐름을 새삼스럽게 자각하면서. 그녀는 저의 손을 한 번에 감싸 쥐는 마츠가와의 손을 곁눈질 했다.


어느새 아이는, 소년이 되어서 이제 청년의 길에 서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누나, 이제 집.”


“어-? 응, 그렇네.”


“왜 그래?”


“뭐가?”


“뭔가 어디 하나 나사 빠진 것 같은 반응이었는데.”


“너는 누나한테 하는 말이 그게 뭐야.”



삐죽삐죽 튀어나온 입술은 비식 웃는 얼굴에 안으로 쏙 말려 들어갔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저렇게 능글맞게 웃는 모습은 매번 보던 것이긴 했지만 클로즈업 해서 이리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누나.”


“으-응?”



쪽, 닿았다 떨어진 입술. 노골적으로 소리를 만들어낸 것을 한 당사자도 알고 있고 받은 사람도 알고 있다. 저의 뺨에 닿았다 떨어진 입술의 온기에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미츠키는 피식 웃었다. 불안했던 것이 우습게도 저의 옆집 동생, 하지만 사실상 동생이나 다름없는 아이는 오랜만의 애교를 부리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웬일로 애교를 다 부리나?”



나붓나붓한 손길로 마츠가와의 뺨을 쓸어내린 손이 톡, 가볍게 그의 콧잔등을 쳤다. 보기 드문 모습을 봤다고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해서. 마츠가와는 그저 픽 웃고는 그녀의 어깨에 두르고 있던 팔을 거두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 거렸다. 



“기분 좋다니까 서비스?”


“어라, 매일매일 좋으면 매일매일 해줄 거야?”


“그럼 서비스가 아니잖아.”


“어, 그건 그렇네. 아, 아냐. 야 서비스가 서프라이즈가 아닌 이상 당연한거지!”


“그럼 서프라이즈로 해.”



투닥투닥, 집에 가까워질수록 오고가는 말과 손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달빛에 살랑살랑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