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게임,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데이트는 늘 그랬듯이 게임이 관련된 것이 아닌 이상은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집이였다. 딱히 배곯을 일도 없고 춥거나 혹은 덥거나 하지 않는. 각자의 취미로 덕지덕지 꾸며진 방은 가장 이상적이고 낙원인 곳이었다. 또한 낯선 곳이 불편한 켄마를 가장 배려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녀가 편안했고 그럴수록 그는 만족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조금 늦어진 탓인지 지하철이 제법 한산했다. 아까 전의 지옥철을 연상케하는 것에 비하면 아주 훌륭할만큼 깔끔한 현상이었다. 켄마는 저를 자리에 앉히고 그 앞에 서있는 쿠로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추며 씩 웃는 것에 배부른 기분이 들다가도. 주변에서 소곤거리는 여자들의 소리에 불쾌감이 늘어난다는 것을 그는 아마도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능글맞게 웃으면서 젠틀한 매력, 꾸러기 같은 행동으로 여자들의 눈길이 자꾸만 향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할 리가 없었다.

 

 

켄마, ?”

 

별로.”

 

 

기실, 그는 분명. 그녀만 보고 있기 때문에 모를 수도 있다는 걸 가정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켄마는 그저 입을 다물고 회피할 뿐이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쿠로오는 정말로 매력적인 남자였으니까. 언제나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어두운 빛이었다. 누군가에게 뺏길지 몰라 냉큼 삼켜버렸지만, 언제 놓칠지 모르는- 그런 불안감은 항상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켄마.”

 

?”

 

자리 났어. 앉을래. 좀 피곤해.”

 

.”

 

 

픽 웃으며 옆자리에 앉은 쿠로오, 그런 그를 위해 조금 허리를 펴고 자세를 바꾸니 곧장 어깨로 떨어진 무게감이 있었다. 그 잠깐을 못참고 잠든 것을 보면 확실히 피곤하긴 한 모양이어서. 켄마는 조용히 바라보다 슥 손을 뻗어 삐죽삐죽 솟은 닭벼슬 모습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평온했다.

 

 

지하철에 내려서도 계속해서 게임을 하려던 켄마는 저의 손을 잡아챈 손이 조금 아프게 조이는 것에 입술을 댓발 내놓으면서 게임기의 전원을 껐다. 건네는 손이 못마땅함을 담뿍 담고 있었지만 쿠로오는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게임기를 받아 켄마의 가방 속에 친절히 넣어주었더라. 두 사람은 집에 가는 길 내내 조용했다. 휘적휘적 걷는 쿠로오와 그런 그의 옆에서 걷는 켄마까지. 둘 사이의 침묵은 무거웠다. 하지만 어색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정적의 묘함이 거슬렸을 뿐이었다.

 

 

쿠로.”

 

?”

 

 

정적을 깬 것은 켄마였다. 언제나 그녀가 부르건, 혹은 그녀를 부르건 항상 쿠로오는 그 눈과 마주했다. 검은 흑진주 같이 반짝이는 눈은 감정을 담고 그녀의 눈을 보았다. 선명한 금안이 반짝이는 것을 그는 언제나 달콤하게 혹은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더라.

 

그게 기분 좋아서.

 

 

-.”

 

켄마?”

 

조금 더.”

 

 

오늘 피곤한데도 조금 무리해준 것에 대한 보답 겸, 이제 곧 보이는 집에 서로 헤어질 지점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나름대로의 서비스를 해주고자 했다. 눈이 마주치고 손짓하자 허리를 숙여 제법 나는 키 차이를 줄인 쿠로오에 손을 놓고 양 뺨을 감싸 쥔 채로 톡, 이마를 맞댄 순간 허리를 감싸는 손이 있었다. 항상 기분 좋게 쓰다듬거나 잡아주곤 하던 그 손이 허리에 엉켜드니 어쩐지 농밀하다. 조금 더, 라는 말에 맞춰 더 숙이면서. 그녀는 그제야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미소짓고는 그대로 뒷꿈치를 살짝 들어올렸다.

 

가볍게 닿았던 입술은 천천히 떨어졌고 다시 한 번 닿았다. 뒷통수를 부드럽게 감싸며 머리를 헤집는 손길에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은 미끄러져 목과 어깨를 감싸며 매달렸다. 조금 거리가 있던 것을 바짝 좁히면서. 켄마는 저를 감싸고 옭아매는 손길에 매달렸다.

 

, 짜릿한 기분이었다.

 

 

잘자.”

 

 

조금 흐트러진 숨, 켄마는 쿠로오의 입술을 가늘고 긴 손끝으로 스치고는 이내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닦아냈다.

 

 

벌써 작별 인사를 하는 거야?”

 

, 허리를 기어오르는 손이 영 못미더워서.”

 

 

분명 이대로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면 다음날까지 그곳에서 있을 것이 뻔한 상황이라는 것을 돌려 말하면서. 켄마는 아쉽다는 양 숨을 쉬며 매달리는 손을 부드럽게 떨쳐냈다. 가라앉아 이글거리는 눈이 한 번 더, 라 조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매정히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아쉬운 듯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켄마는 부러 꿋꿋하게 무시하고는 집으로 서둘러 들어섰다. 방으로 올라가는 길 내내 입가 언저리를 문지르는 손은 홧홧한 열기를 온전히 느끼고 있었다.

 

작은 미소가 부드러이 매달려 있었다.

 

 

켄마는 언제나 쿠로오에게 하지 못하는 말이 있었다. 좋아해, 혹은 먼저 뽀뽀하기, 키스 조르기 등 그를 기쁘고 안달나게 하는 말과 행동들을 알고 있었지만 그 중 유독 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결코 쿠로오에게 이유를 말한 적도 없고, 또한 말할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항상 그 앞에서 주춤거렸다. 그는, 그걸 강요하지 않았다.

 

 

휴일이었다. 나른하게 늘어지는 아침을 깨우는 따사로운 햇빛을 피해 커튼을 단단히 치고 침대 안으로 파고든 켄마는 늘어진 몸을 따뜻하게 덮어주는 이불을 들추는 손길에 웅크린 몸을 펴고 가늘게 눈을 떠 이불을 들춘 이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어차피 네코마의 실질적인 권리자, 모친이 아니면 쿠로오였다. 딱 정해진 사람만이 그녀의 이불을 들췄고 잠든 그녀를 끄집어냈다.

 

 

켄마.”

 

쿠로, 무거워.”

 

 

빛을 등진 새카만 머리칼과 짓궂은 미소를 눈에 담은 그녀는 그대로 미련 없이 그 자리에서 깊이 눈을 감으며 몸을 말았다. 곧장 이불이 다시 가라앉고 무겁게 허리를 누르는 손길에 무겁노라 투정을 부리니, 더 파고드는 것에 한숨을 푹 내쉰 그녀는 저의 정수리 위에 자리한 묵직함에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곧장 밑으로 파고든 익숙한 것에 살며시 눈을 떴다가 다시 깊이 감으면서. 저의 허리를 감싸 안았던 손이 등허리를 타고 도닥이는 것에 긴 숨을 내쉬었다.

 

 

사랑해, 켄마.”

 

 

귓가에 속삭이는 말에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깊이 그 품안으로 파고들 뿐이었다.

 

 

그래, 그래. 잘자.”

 

 

그녀는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보았다. 그는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와 사귀고 있었다. 어떤 여자는 긴 머리에 가는 몸, 하늘하늘한 몸짓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객관적으로, 그리고 주관적으로 보기에도 예뻤다. 미녀였다. 키도 제법 커서 배구부 출신의 그 옆에 섰을 때 두 사람은 퍽 어울렸다. 선남선녀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잘 사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질투하다가도 결국엔 인정하고 축하해주는, 그런 공식적인 사이가 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그랬던 그와 어떤 여자가 헤어졌다. 사랑해, 라고 말을 한순간 표정이 사라진 그를 그녀는 보았다. 그가 얼마나 무섭도록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는지도 기억했다.

 

그녀는, 결코 사랑한다는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번쩍 눈을 뜬 순간 켄마는 새카만 어둠을 보았다. 저의 품에 고개를 묻고 온몸으로 그녀를 껴안아 매달린 쿠로오 탓에 그의 머리칼이 그녀의 시야를 가린 것이었다. 떨어지려고 해도 꽉 붙들어 맨 손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녀는 깊은 숨을 내쉬며 쿠로오의 새카만 머리를 그냥 쓰다듬을 뿐이었다.

 

기분, 나쁜 꿈을 꿨다며 그에게 말하고 투정부리고 싶었던 마음은 순식간에 사그라 들었다.

 

 

어리광 부리는 쿠-로네.”

 

 

흥얼흥얼 검은 머리칼을 부드러이 헤집으면서. 그녀는 부러 자신에게 매달리는 쿠로오를 억지로 떼어내진 않았다. 그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잠든 척 매달리는 것을 알면서도 짜증을 내지 않고 받아 주는 그녀의 마음을 그 역시 모르진 않을 것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그녀가 사랑해, 라는 말을 하지 않는 걸 그는 몰랐다. 그녀에게 조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서운함을 삼키진 않았다.

 

켄마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나붓한 손길이 그를 헤집었다.

 

 

그녀의 고양이는 사랑한다는 말을 조르고 있었지만, 차마 해줄 수 없는 말이었다.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 고양이는 홀라당 만족하고 도망칠지 몰랐다. 장난기와 짓궂음이 가득한 그이니, 아닐 거라는 믿음도 확신도 없었다.

 

장미를 가져갈 수 없게 쳐놓은 울타리 너머, 붉은 장미는 탐스럽게 피어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고양이는 울타리 밖에 있었다. 고양이의 눈은 탐욕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흔들리는 장미는 그 앞에서 애타게 유혹하고 있었다. 그녀는, 저 울타리를 거두고 장미를 꺾어 고양이에게 쥐어주면 그것을 물고 도망칠- 고양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고양이는 조르지만, 그녀는 외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