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여기 왜 있어?”
“편입.”
*
닿는 말에 서린 의문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서. 나 또한 그저 당연하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더라.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걸 낌새는 없었기 때문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 서로 교차된 시선 속에서 한 없이 고요한 정적이 우리 둘 사이를 가로 짓는다. 문득 살살 밀려드는 쌀쌀함에 몸을 살짝 움츠리니 서로 마주치고 있던 시선이 미끄러져 내린다.
어긋난 시선의 끝에서 너는, 늦게 깨달은 추위에 몸을 떨고 있는 내게 닿았다.
"겉옷은 안가지고 나온 거야?"
"─응."
그럴 여유가 어디 있었을까. 사실상 내가 이 새벽 거리를 돌아다니게 된 것 자체가 즉흥적이요, 그냥 가족들을 깨우기 싫었음에 튀어나온 기행이었거늘. 미미하게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 또 눈에 보여서. 왠지 눈치를 보게 되는 자신에 어딘가 자존심이 상해서 굽힌 몸을 바로 세우고 짧은 반바지의 주머니 속에 손을 밀어 구겨 넣었다. 또 다시 시선이 닿았다, 이번엔 훤히 들어난 다리.
"아사쿠라, 집은 어디?"
"그건 왜?"
"슬슬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어? 날도 추운데다가- 지금 그 차림은 좋지 않아."
"자상해라, 하나마키군은."
"비꼬는 거야?"
얼굴이 일그러진다. 문득 웃음이 튀어나왔다. 몇 년을 징그럽게 보고 살다 잠깐 떨어졌던 3년, 그 사이에 제법 자란 너는 어색하다. 그리고 너 또한 날 어색해 하는 게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우리 사이에 벽이 생겨버렸다.
그리고 그걸 너는 외면하고 있더라.
"아닌 것 같아?"
짧은 호흡을 끊어내며 가슴 속 깊이 숨겨두었던 빈정거림을 주섬주섬 끌어 모아 터트렸다. 살짝 벌린 다리, 어릴 적부터 유독 짝다리를 짚으며 서던 내 나쁜 버릇 중 하나가 나타났다. 유독 네 앞에서만, 더 도드라지게 나타났던 그 버릇. 보라, 네 얼굴이 어렴풋하게 일렁이는 과거를 잡는 양 흐려졌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너는 여전히 가벼운 제자리걸음을 하며 몸이 식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그제야 네가 왜 이 새벽 거리를 헤집고 다녔는지 깨달았다.
"로드워킹?"
"경기에서 오래 버틸려면 노력 해야 하니까."
덤덤히 내던진 말에 담긴 가시가 어쩐지 아프다. 아니, 너는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겠지. 말하지 않았고 그것이 기사가 되어 나가지 않았음을 또 알기 때문에. 네가 모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까 저 가시는 네가 품은 것이 아니라 내가 담은 것이겠지. 내 마음이 그리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겠지.
눈을 감았다 떴다. 더 이상의 대화는 내게 좋지 않았다. 꽁꽁 눌러 짓이긴 생각들이 비죽비죽 날카롭게 튀어나오고 있었다.
"갈래."
"─그 꼴로?"
"하? 내 꼴이 뭐 어때서?"
"너 요즘 뉴스 안보고 사냐?"
따라붙는 걸음이 들린다. 시끄러워, 저리가. 날카롭게 던진 말에 져지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는 것으로 무시한 너, 순식간에 하락한 기분이 날카롭게 번진다.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야, 아득 이를 갈다 흥하고 콧바람을 세게 불고는 고개를 힘차게 돌렸다.
어느새 새벽의 거리, 무겁게 깔린 공기가 슬금슬금 기어올라- 도망치고 있었다. 햇볕이 구름 너머로 비죽 쏟아지고 있었다.
"야."
"뭐."
"예전 그 집으론 안 돌아오는 생각?"
찰나, 헛 삼킨 숨에 콜록- 낮은 기침을 토했다. 시선이 닿았다. 후드 사이로 땀에 젖은 머리칼이 늘어지고 그 사이로- 시선이 닿는다. 기분이 나빠졌다.
"너, 지금 시비 거는 거지?"
"헛소리, 내가 왜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하겠어? 너랑 에너지 소비하는 건 대화 정도로 충분해."
"참- 자상하기도 하셔라, 그럼 왜 나랑 대화하면서 에너지 소비하는 일을 하시겠다는 건지? 그냥 가시지 그래? 슬슬 말투 사나워지는 게 너도 싫잖아."
언제였더라. 첫 만남은 솔직히 좋았지, 아직 어렸을 때였으니 더 더욱이 잘생긴 남자애를 보는 기분은 즐거웠으니까. 근데. 초등학교, 그 6년이란 기간 동안 너는 내게 무슨 짓을 했던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에 나는 맞아 죽어갔더라. 그래서 이렇게 도망쳤다가- 결국에 다시 끌려오듯 혐오스런 이곳에 돌아왔고 너를 만났는데.
네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이란 돌에 개구리가 된 나는 형편없이 맞아- 죽을 뿐이었던 이곳에 다시 숨 막힘을 느껴가며- 어떻게 돌아왔는데.
"조금 있으면 로드 워킹 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거야."
"그러겠지. 이 근방에 그 잘난 아오바죠사이가 있는데."
"그 잘난 아오바죠사이에 너도 다닌다."
"…하. 나 아직 편입 서류 다 처리 안 했거든?"
"그래봤자, 네가 올 곳이 거기밖에 더 있냐."
명확한 답은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돌리는 네가 짜증나서 확 걷어차려다가 참았더라. 어쨌든 너는 운동선수, 내가 포기했던 그 운동선수란 이름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불만스러워도 그것 하나로 부실 수는 없었다.
내가 부셔 졌다고 남을 부시는 그런 똑같은 역겨운 짓을 내가 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내가 너무 불쌍했으니까.
"아사쿠라."
"왜."
"난 이쪽, 넌?"
"─상관하지 말라니까?"
"갈 생각 없으면 우리 집 가자."
하? 내가 왜? -라는 말이 채 나가기도 전에 어이없다는 시선만으로 그 다음 답을 낚아 챈 녀석이 멋대로 팔목을 잡고 잡아끌었다. 뿌리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쉬이 저항할 수 있었던 초등학교 때와 달리 지금은 힘들었다.
새삼 데구륵 굴린 눈이 앞서가는 뒷모습을 훑었다. 그때 보다 더 커진 키, 그때보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 그때보다 더 넓어진 어깨와 등, 그리고- 단단하게 자리 잡은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는 효과적인 근육들. 새삼스럽게. 너의 손 하나에 다 잡힌 팔목을 내려 봤다. 새삼스럽게, 달라졌음을 인정하고야 말아서. 새삼스럽게- 연약해진, 내가 우스워서.
그냥, 반항할 힘 한 줌조차 사그라들어 그대로 끌려갔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