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와의 뜻대로 빨갛게 머리를 물들이고자 한 마유는 그날 당장 그와 함께 미용실로 달려갔다. 아주 작은 변덕으로 고른 와인에 가까운 레드 컬러는 그녀의 짙은 주홍빛 눈동자와 어울리는, 그런 색이었다.
*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어린 후배와 헤어진 이후, 곧 있을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연습경기에 갈 생각으로 들떠있던 마유는 오키나와에서 들려온 비보에 급히 부모의 손을 잡고 비행기를 타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조모의 장례식, 그리고 이어서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조부의 장례식까지 잇따라 치룬 마유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겨우, 일주일여만에 미야기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별로, 사이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할머니랑 할아버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니까. 그냥, 막 눈물이 나더라고. 그래서, 조금 눈 빨개지고 말았달까. 걱정했어?”
“….”
“─저기, 토오루?”
“미안해, 마유. 나, 좀 바빠.”
“어, 그, 그래.”
그리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여유가 사라져 늘상 달고 다니던 미소가 사라지고 없는 오이카와였다.
어차피 한동안 연애란 것을 지양할 생각이었던 그녀는 정말로 연애란 것에서 잠시 자신을 떼어놓았다. 답지 않게 흔들리는 모습을 방어막도 없이 온전하게, 대놓고,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저의 소꿉친구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3학년 들어서 조금 초조하긴 할지라도 기필코 우시지마라는 그 진절머리 나는 괴동에게서 이기고 말겠다고 잔뜩 기운이 들어갔던 녀석이었는데. 인터하이가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에서, 그는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마치 쫓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니, 불구덩이로 자진해서 달려드는 하루살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가 먼저 말해줄 때까지 일단 숨을 삼켰다.
“이와쨩.”
“하라다?”
“토오루는?”
“─저 쪽.”
부러 배구부 학생들이 다 돌아간 후, 배구부를 찾은 그녀는 여전히 엉망진창인 오이카와의 모습에 와그작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정말로 그녀가 모르는 일주일의 시간동안, 카게야마와 헤어지고 난 바로 뒤에 있었던 연습경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듯 했다. 그날을 포함해서 일주일이란 시간을 통째로 집안 사정 하에 날려 먹었던 마유로서는 오이카와의 불안감도, 이상 징세의 원인도 알 수 없었다. 이와이즈미마저 입을 꾹 다물고 그저 오이카와의 감시만 자처할 뿐이어서.
그녀는. 쫓기듯이 다급하게 서브 연습을 하는 오이카와를 그저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언제나 나서서 미주알고주알 그녀에게 말하던 오이카와는, 그곳에 없었다.
“언제부터 저랬던 거야?”
“오래 됐어.”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코트 밖의 사람이 아닌 같은 코트에서 뛰는 이와이즈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오이카와의 상태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가. 말리지 않고 있다는 것은 조금이라도 그 엉킨 속을 풀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해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만은 있어서. 마유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사납게 오이카와를 바라보다 머리를 짚었다. 골치가 아팠다. 문득 저런 오이카와라면 결코 그녀에게 속내를 까발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자기 속으로만 곪아드는 경향이 있는 녀석이다 보니, 그녀가 알아서 그의 주변을 파고 다니면서 재깍재깍 원인을 알아내 손을 쓰던 것이 이미 수차례였다.
“─하.”
한동안 그러지 않아 괜찮은 줄 알았더니. 하필이면, 그녀가 자리를 비웠던 그 일주일이란 시간이 문제가 될 줄이야.
참담함에 잇새 사이로 거친 숨이 찢겨져 나갔다. 그 잠깐의 지켜봄으로 그녀는 기다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은 기다린다고 해서 저 오이카와가,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털어냈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녀가 먼저 묻지 않는 한, 정확한 것을 들고 찾아가 말하라고 윽박지르지 않는 한 그는 끝까지 입을 다물 것이었다.
“이와쨩, 뭐가 문제야. 도대체.”
말해, 단호하게 자르면서. 더 이상 기다릴 수도 없었고 두고 볼 수도 없었기에 기어코 참았던 화를 내는 그녀에 이와이즈미는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입장으로선 오이카와의 속내를 함부로 말해줄 수가 없었다.
그 속이 곪아가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을 터였지만, 그 이유와 근본적인 좌절과 고통을 과연 그녀가 이해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이 코트 밖에 있는 그녀가, 부활에서 항상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구는 그녀가. 저 앞뒤로 사면초가인 녀석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지 그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그래서, 이와이즈미는. 저를 사납게 노려보는 마유의 시선을 그저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쾅, 쾅.
요란스럽게 내리꽂히는 공 소리가 처연히 울렸다.
*
시간이 약일 수 있다는 말에 일단 두고 보기로 했던 마유는 날이 갈수록 가관인 오이카와에 바득 이를 갈아야 했다. 이와이즈미도 사태의 심각성을 키우는 데에 한몫을 했기 때문에 그런 그녀의 매서운 눈길에 어쩔 줄 몰라 할 뿐이었다.
벌써 나흘째 계속 되는 부활동이 끝난 이후의 자율 훈련. 아니, 저것은 훈련이 아니라 고문이다. 자기의 몸을 스스로 채찍질하며 고문하는 것이었다.
“토오루!”
날카로운 비명과도 같은 울림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실내에 획을 그으면서. 그녀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오이카와는 땀을 뚝뚝 흘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묵묵히 공을 들어 올려 높이 띄우고, 그것을 쳐내는. 서브연습을 할 뿐이었다.
“하. 야 오이카와 토오루.”
시선 한 번 돌리지 않는 그 묵묵함에. 머리끝까지 차오른 열을 씩씩 거리며 삼키던 마유가 돌연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는. 묵묵부답으로 서브할 뿐이어서. 한 번 뛰어 오르고 착지하면서. 조금 비틀 거리는 모습에 기겁한 마유가 달려들자 그 손을 강하게 뿌리치는 것에.
─그녀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어이, 오이카와!”
벼락같이 내려찍는 이와이즈미의 호통, 그리고 한 차례의 묵직하고 둔탁한 충격.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에게 던지고 튕겨나간, 그것을 반사적으로 받아내면서. 마유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주저앉은 그를 내려 보았다, 오이카와의 힘없이 앞으로 꺾인 고개를 내려 보았다.
그는. 결코, 그녀에게 눈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버 워크야. 감독님도 눈치 채셨다고.”
단호하게 자르면서. 이와이즈미는 억지로 주저앉은 오이카와를 끌고 샤워실로 향했다. 홀로 남은 마유는 그대로 풀썩 주저앉아 안고 있던 배구공을 더욱 깊이 끌어안으며 고개를 수그렸다. 혼란스러웠고 짜증이 일었으며 그리고 동시에 화가 났다. 아주 깊은 화, 어쩌면 서글픔이란 것까지 어우러진.
도대체 그녀가 없던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엇이 문제였는가. 무엇이. 그를. 그렇게. 초조하게, 만들었는가. 몰아세웠는가.
앙다문 잇새 사이로 꺼질 듯이 희미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
그 뒤로도 오이카와는 여전했다. 한결같이. 그는 숨 쉬는 것 하나하나가 갑갑하고 괴로운 것처럼 굴었다. 초조함에 저의 숨통이 조여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로 그렇게 그는 배구에 매달렸고,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 세웠다. 슬슬 주변 사람들도 이상하다고 눈치 챌 때 쯤에야.
그제야. 마유는. 자신이 없던 기간 동안에 있었던 일을 오이카와의 팬을 통해 들었다.
천재였다고 했다. 괴물이라고 했다. 그랬던 그 괴물이, 하필이면 그를 골랐단다. 자신의 목표이자 이상으로, 꺾어 짓밟고 서야 할 디딤돌로 고른 사람이 오이카와였단다. 주제도 모르고 천재라는, 그 같잖은 이름에 어울리는 재능으로 그렇게 벽을 보고 숨이 막혀 있는 오이카와의 발목을 붙잡아 짓눌렀단다. 앞과 뒤로, 사방이 막혀 있는 그런 느낌 속에서 더욱 분발하려던 그가, 그 이와이즈미와 콤비 미스를 내고 코트 위에서 비참하게 끌어 내려져 내동댕이를 당해야 했다고 한다. 그, 괴물. 천재라는, 그 재수 없는 족속 중의 하나인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후배에게. 그렇게. 그는 그 고고한 자존심을, 세터에 대한 사랑을 짓밟혀야 했단다. 고작 천재라는 이름에, 재능에.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 추레한 비참함이었다.
“이와쨩!”
쾅, 달려들어 내리찍는. 퍽 소리가 크게 울려 그녀의 가냘픈 손과 손목을 걱정하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와이즈미는 심드렁하게 저의 책상을 강타한 마유를 올려 보았다. 그녀의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알아냈구나, 싶은 생각보다는 그냥 미리 말할 걸 같은 후회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리라.
“왜 말 안했어.”
그 역시 소꿉친구라는 타이틀로 묶이곤 했지만 옹알이도 제대로 못하던 시절부터 함께 했던 둘 사이의 유대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둘이 친 혈육이 아니라고 해도 서로에게 있어서 상대방은 가족과도 같은 사이라는 것을 그들 사이에 껴있는 이와이즈미로서는 모르는 척 하고 싶어도 알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항상 한발자국 뒤에 서서 둘 사이의 위태로움을 보고 있는 그로서는, 알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봤자 소용없었을 걸 너도 잘 알잖아.”
마유는, 분하게도 반박할 수가 없어 입술을 앙 깨물었다. 오이카와는 지금 철저하게 그녀를 무시하고 있었다. 극한까지 몰려 있는 상태라서 주변을 볼 여유가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정말 분하게 싫었고, 역겹도록 싫었다. 주변을 살피지 않고 연애를 한 한때의 자신이 정말로 화가 날 정도로 싫었다.
“그래서 너는, 이대로 토오루를 내버려 둘 생각이야?”
사납게 일그러진 목소리는 그녀의 처절함을 알려주고 있었다. 처참한 기분이었다. 같은 남자가 아니라서, 같은 선수가 아니라서, 같은 코트 위에 올라설 수가 없어서, 그의 신뢰가 가득 담긴 공을 칠 수가 없어서.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어서. 그녀는. 항상 눈앞에 서있는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등만을 봐야 했다. 두 사람이 설로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코트 위를 누비는 것을 그녀는 그저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계집이라서, 사내가 아니라서. 그래서 친구는 될 수 있어도, 동료는 될 수 없는.
그녀는 순간 차오르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 것에 입술을 세게 짓이겼다. 알싸한 아픔에 어느 정도 달뜬 감정이 조금 고개를 수그렸다. 무뚝뚝한 표정에 덤덤한 모습이지만 당황한 모습이 역력한 이와이즈미는 모르는 척, 가방에 있던 이온 음료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뒀다.
마유는 그것을 힘차게 낚아채 뚜껑을 열고 마셨다.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에 자리로 돌아가면서. 그 잠깐 사이에 잠긴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나직하게. 마유는 분을 삼키고 서글픔을 짓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