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고개를 가누기 시작할 때였던 갓난아기들이 뭘 안다고 저의 올망한 손에 끼워진 반지를 알았을까. 반지에 새겨진 그 이름을, 의미를 알았을까.
언제나 자식은 부모의 뜻에 의해서 장래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너무 허다했다.
*
손 모양으로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식히기 위해 얼음 팩을 붙이면서. 소녀, 마유는 저의 곁을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맴도는 이를 향해 진한 한숨을 내쉬면서 손을 내밀었다.
“토오루.”
잘생긴 얼굴, 잔뜩 울상으로 만들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간 그는 어김없이 저의 뺨을 잡아 늘리는 손에 긴 숨을 내쉬어야 했다.
“정말이지, 이게 뭐니. 응? 어떻게 된 게 매번 똑같은 패턴이야. 너 여자친구 문제에 내가 꼭 끼어야 만족하니? 응? 난 내 연애사에 너 안 끌어들였잖아!”
조곤조곤 이어지던 말이 뒤에 가선 버럭, 반 옥타브 가량 위로 솟았다. 오이카와는 쩌렁쩌렁한 마유의 목소리에 한 번, 그리고 그녀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것 없다는 것에 두 번 어깨를 움츠리며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하여튼. 우리 약속 어디 갔냐고.”
“미안해, 마유.”
매섭게 위로 올라선 눈꼬리에 펄펄 풍기는 분노에 상대가 한껏 움츠러들었을 때쯤에야. 한쪽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이와이즈미가 적절한 타이밍에 중재를 시작했다. 당장 모레 있을 시합에서 컨디션이 바닥을 뚫고 지나간 오이카와가 불안정한 페이스로 연습시합에 임하는 것은 곤란했다.
“하라다. 거기까지만 해. 너도 알잖아, 저 바보 오이카와도 나름대로 주의했다고. 근데 그걸 어기고 나간 건 저 녀석 여자친구였고.”
“전, 여자친구야 이와쨩.”
“그래, 그렇단다.”
깊은 짜증은 여과 없이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마유는 일단 참았다. 확실히 이와이즈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오이카와가 얼마나 저를 끌어들이지 않을려고 애를 썼는지 그녀는 모두 다 알고 있었다. 도를 넘어선 것은 오이카와가 아닌, 그의 ‘전’ 여자친구씨였다. 분풀이는 알맞은 곳에 해야지, 엄연히 말해서 피해자 쪽인 오이카와에게 할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그녀를 걱정해서 달려왔고 지금 화난 그녀에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에게 할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늘. 오코노미야키에 타코야키. 잊지 마.”
“응, 알았어.”
여즉 뺨을 잡고 있던 손을 놓자 빨갛게 부은 것이 그녀의 시야에 잡혔다. 그녀도 원체 피부가 약한 편이었지만 오이카와는 다른 의미로 연약했다. 결국 저가 잡아 빨갛게 부푼 곳을 손으로 문질러주면서. 마유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약속, 잊지 말란 말이야.”
부모끼리 멋대로 정한 혼약자. 어렸을 때야 뭣도 모르고 그러려니 하고 따랐던 것이지만 조금 머리가 자란 이후에 둘은 그것이 불공평한 처사인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끈끈하게 달라붙은 부모연합을 아직 새파랗게 어린,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두 사람이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둘은 부모 몰래 둘이서 연합하기로 했다. 혼약자라고는 하나 법적으로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말 그대로 말로만 묶인 사이, 그 전까지 각자 연애를 하는 것에 그 어떤 피해도, 터치도 하지 말자고 약속했더라.
그리고 그것에 충실해서 오이카와도, 마유도 각자 다른 사람을 만나고, 사귀고. 그것을 반복한지 어언 4년째. 그 동안 오이카와의 여자친구들이, 혹은 그의 팬들이 마유에게 와 깽판을 친 것은 그 기간의 절반 이상인 3년째였다.
“알겠어? 다음은 진짜 국물도 없어, 너!”
“넵!”
그렇게 자꾸 연애만 하면 사고를 쳐 피해를 주다보니 항상 그 약속 앞에서 오이카와는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 3년이란 기간 동안 마유가 오이카와에게 민폐를 끼쳤던 적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최근에 그녀의 어린 남자친구가 끊임없이 서브를 가르쳐 달라고 조른 것 이외에는 딱히 문제 된 것이 없었다. 그나마도 연애사 쪽으로 한 것도 아닌 개인사로 귀찮게 군것이니, 정말로 그녀는 그 약속에 충실했던 것이다.
“하라다, 오이카와. 끝난거면 이거나 갈지 그래.”
어느새 다 녹은 얼음 팩을 거둬가고 새로운 얼음 팩을 뺨에 붙여준 이와이즈미에 순간의 차가움으로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린 마유가 그대로 오이카와의 품에 안겼다.
“으악! 놀랐잖아!”
“어, 그래 미안.”
“─이와쨩!”
“자자 마유, 이와쨩은 듣지도 않을테니- 뺨에 이거나 하고 있자.”
불만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오이카와가 뺨에 문대는 얼음 팩의 차가움을 느끼고 있던 마유는 데구륵 시선을 굴렸다. 어쩐지 질린 기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와쨩?”
“왜?”
“아니 나야 말로 왜?”
“하?”
오이카와에게 안겨있던 자세에서 몸을 돌려 그의 다리 위에 걸터앉은 마유는 제 손으로 오른쪽 뺨을 얼음 팩으로 문지르며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떨어지지 않게 붙잡으면서 비어있는 왼쪽 뺨에 마찬가지로 얼음 찜질을 해주던 오이카와의 시선도 이와이즈미에게 향했다.
“아냐, 됐다. 됐어. 빨리 찜질이나 해서 붓기나 빼.”
조금 있으면 종례 때문에 올라가야 한다고. 팔짱을 끼면서 심드렁하게 덧붙인 말에 마유는 입술을 삐죽였다. 누가 맞고 싶어서 맞았나. 누가 이렇게 붓고 싶어서 부었나. 억울함이 퐁퐁 솟았지만 그녀는 아까 전의 대화로 거기서 끝내기로 했기 때문에 홀로 씨근덕거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 붙어있는 오이카와의 기민한 감에 걸려 불편함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코노미야키, 두 판먹을 거야.”
물론 다 삼켜지지 못한 화였지마는. 오이카와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종례까지 다 끝난 후, 주말에 있을 시합 때문에 얼결에 얻은 부활동의 휴가를 마음껏 즐기기 위해 오이카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 반인 이와이즈미와 마유와 만나러 가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앞에서 정말 재수없게 귀여운 후배님을 보았다.
“응, 헤어지자.”
그리고 그의 소꿉친구이자 일단은 혼약자인 마유의 연애 종료 역시, 보고 말았다.
“마유?”
“아. 토오루, 왔어? 이와쨩. 이제 가자.”
할 말이 많아 보였던 이와이즈미가 이윽고 입을 달싹이다 꾹 다무는 것으로. 마유는 별 것 없다는 상쾌한 얼굴로 앞장섰고 이와이즈미가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있는 오이카와를 불렀다.
어이. 단호하게 잘라낸 그 말에 그는 불만스러움을 주렁주렁 매단 채로 이와이즈미에게 다가갔다. 고개 숙인 후배는 이미 그의 고려대상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재밌는 것을 보는 동급생들의 시선이 불쾌하게 달라붙었지만, 그들은 무시한 채로 어느새 가고 없어진 마유의 뒤를 쫓았다.
“무슨 일인 거야.”
“가서 말해.”
“─알았어.”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이와이즈미의 말에 오이카와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1층의 신발장에는 그새 신발을 갈아 신은 마유가 그들의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
“오이카와씨가 인기가 많아서 그런 거야!”
“오냐. 그래. 그렇다고 해줄게. 어서 갈아 신으세요, 이케멘씨.”
픽 웃으면서 머리끝을 매만지는 모습에서 분명 짜증은 없는데도. 어쩐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꿀렁꿀렁 불쾌감과 뜻 모를 감정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애써 미소 지은 채로 신발을 갈아 신고 마유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무겁다며 손등을 치는 손길이 퍽 따가울 법도 했지만 그는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머리, 자를 거야?”
“염색할 거야.”
반년 뒤면 졸업할 이들이었고 애초에 학교에서 염색이나 펌에 대한 제재가 그리 심한 편은 아니었기에 마유는 심드렁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연애가 끝나면 좋던, 싫던 그녀는 자신의 외향에 변화를 주었다. 그것이 그녀는 새롭게 만날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고 우습잖은 자기 어필을 했다.
“헤에-. 이번엔 빨간색이 좋을 것 같아.”
“그건 걸리잖아, 바보카와.”
“엑, 탈색까지 할 거였어? 탈색 안하면 괜찮을 걸.”
그건 좀 고민되는 말인데, 고민하던 마유는 문득 들어와야 할 태클이 없어 가던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함께 걷던 중이었던 오이카와 역시 얼결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마유?”
“이와쨩은?”
“─어라.”
그제서야 둘은 한 사람의 부재를 떠올리고 급하게 뒤를 보았지만 이미 두 사람이 찾는 그는 없었다. 그때. 마유의 핸드폰이 긴 울음소리를 흘리며 살아있음을 어필했다.
“어, 이와쨩이야.”
메일이었다. 오늘은 따로 가겠다는. 마유가 얼굴을 찡그리고 오이카와의 미소가 조금 어긋났다. 그들은 분명 이와이즈미가 마유의 어린 남친이었던, 전 남자친구가 되버린 그에게 시간을 내줬을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오이카와로 메일이 왔다.
“싫다아- 토비오쨩.”
“어쩔 수 없지. 이와쨩은 상냥하니까. 그냥 우리끼리 데이트 하던가.”
“그럴까나아-.”
마유의 짜증은 오이카와의 살가운 미소에 금방 흩어졌다. 저 살가운 미소 뒤에 숨어있는 궁금증과 물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짜증보다는 걱정을 해야 할 시간인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오이카와 몰래 깊은 한 숨을 쉬었다. 어떻게 연애가 매번 힘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