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 수업이 다 끝나고 나서야 사촌에게 무작정 보냈던 내용들을 다시 한 번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수업내용을 정리한 리아는 쭈욱- 가벼운 기지개를 켰다.
도쿄 명문, 제대로 이름값을 하는 것에 혹사당한 몸이 비명을 질렀다.
-띵동
말간 소리가 짧게 울렸다. 어차피 모두 끝났기 때문에 다들 저마다 핸드폰의 알림을 켜놔서 그 사이에 묻혔을 저의 라인 알림을 확인한 리아는 살풋 미간을 좁혔다.
[설마 짝지 이름 아직도 모르는 건 아니지?]
날카롭게 파고드는 소꿉친구의 말에 사촌의 침묵이 따라오는 것을 애써 외면하면서. 신경 쓰지 말라 못을 박아뒀음에도 물고 늘어지는 그에 언제 한 번 기필코 등짝을 세게 두드려 패고 마리라 다짐했더라.
"쓸데없이 예리해-."
곰곰이 생각을 곱씹어 봐도 나오지 않는 이름에. 리아는 계속해서 저의 짝지 이름을 날카롭게 묻는 오이카와의 라인을 짜증스럽게 노려보았다. 오른손 엄지의 안쪽 살을 잘근잘근 깨무는 그녀의 혀끝이 빨갛게 부푼 살덩어리를 쓸었다.
반복되는 추궁과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쏟아지는 날카로운 추리가 뼈아프다. 그제야 짝지의 이름이 들어나지 않았음을 깨달은 사촌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까지 쏟아지니 이젠 피곤할 따름이었다. 결국엔 라인의 알림을 끄고 아예 무시하고자 핸드폰을 뒤집어 내려놓은 그녀는 가만히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얌전히 침묵하고 있는 책상 위의 핸드폰을 내려 보는 눈이 영 피곤했다.
그녀는 결국 푸욱 한 숨을 내쉬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있잖아."
"-응? 나?"
"그럼 누구겠어."
"핸드폰 보고 말하면 누군지 모른다고 생각해."
여기도 꽤 날카로운 가시를 품은 말을 던질 줄 안다. 첫 인상으론 이런 말 잘 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리아는 새삼스럽게 모든 사람들이 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만고의 진리를 되새김질했다. 느리게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이 이내 미끄러져 컬이 들어간 머리끝을 매만졌다.
“내가 말 걸 사람이 너 말고 또 누가 있겠니. 주변에 있는 사람이라고 너 한 명뿐인데.”
핸드폰에서 시선을 거두고 부러 나긋하게 고개를 돌려 마주친 눈동자 속에 담긴 불만은 곱게 휜 눈웃음 사이에 숨기면서. 리아는 느릿하게 머리끝을 문지르다 이내 입술 위를 문질렀다. 창문을 등지고 턱을 괸 채 웃고 있는 짝지의 자신만만한 얼굴이 어쩐지 마음에 들진 않았다.
"됐고. 우리, 서로 이름도 모르는데. 통성명 할 거야?"
"헤에- 계속 짝지군, 짝지군 해서 이름 안 물어 볼 줄 알았는데."
"그럼 그럴까? 이름 정도야 출석부 보면 되니까."
뜻대로 휘둘릴 생각 한 줌 없는 리아는 화사하게 웃으며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는 짝지를 보았다. 쉬이 휘두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알려주는 것은 말 그대로 우위를 점한다는, 남자 형제 둘 급의 동갑내기 친구들 사이에서 그녀가 배운 힘의 세계에서로의 파편이었다. 그러니 저 짝지를 찍어 누르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너무도 쉬운 것이었다.
그녀의 화사한 미소가 조금 지나도 흔들리지 않는 것에 그녀의 이름 모를 짝지가 먼저 입술을 비틀었다.
"됐어. 난 보쿠토."
이름은 없이, 성만. 리아는 그저 꽃다운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이름도 전부 알려줄 필요 없이 성만 남기면 되리라.
그녀는 고운 색으로 물들인 입술을 달싹였다.
"이와이즈미."
퍽 달콤하게 간드러지는. 고저 없이 일관적인 목소리는 필히 먼 타지의 친우들이 들었다면 도망쳤을지도 모르는, 그런 폭풍 전의 고야를 품은 것임을 시인하면서. 리아는 그저 의뭉스런 빛을 집어삼킨 유려한 미소만 흘릴 따름이었다.
"이와이즈미…? 혹시 너, 아. 아니다."
"흐-응?"
얼버무리는 얼굴에 고개를 갸웃, 리아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하던지 간에 상관없이 어차피 궁금함은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구태여 말을 이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더 이상 대화를 할 이유가 없으니,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저 시끄럽게 잔소리를 쏟고 있는 라인이 중요할 따름이었다.
아주 잠깐 동안에도 얼마나 시끄럽게 잔소리를 쏟아내는 것인지. 쌓인 것만 해도 읽기 버겁다. 그녀는 그냥 무시하고 다 내려버리고선 이내 빠른 속도로 자판을 두드렸다.
[내 대인관계보다 네 관계나 신경 써, 바보!]
줄줄 이어지는 걱정 어린 말에 돌리는 말치곤 퍽 사납다. 하지만 그녀는 딱히 다른 말을 덧붙일 생각이 없었다. 이런 화법 역시 그녀의 소꿉친구와 사촌에게 배운 것이니 그들은 분명 과거의 그녀를 떠올리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한탄 할 것이었다.
리아는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분명 지금 이를 갈며 오이카와 같은 녀석이랑 같이 두는 것이 아니었다며, 후회를 곱씹을 지도 몰랐다.
허나. 그런들 어떠하고 이런들 어떠하나. 아무리 후회하거나 혹은 물들인 원인을 때려잡아도 이미 저는 바뀐 이후인데. 작게 키득거린 리아는 아니나 다를까 오이카와의 찡찡거림이 가득 쏟아지는 개인 라인을 보곤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너무나 우아하고 재빠른 손으로 라인의 전체 알림을 오프시켰다.
*
집으로 가기 전 한 번 둘러본 학교는 퍽 컸다. 도쿄의 높은 땅 값이라던가를 고려한다면 부지가 상당히 넓다. 역시 명문인 것인가, 리아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와 그리고 친우들의 영원한 숙적 역시도 이름난 학교들의 손을 뻗을 정도로 그리 흉흉한 녀석이었다. 기어코 골라 간 돈 넘쳐나는 학교에 적을 올리고 그 흉흉한 기세를 갈고 닦고 있었다. 자고로 돈이란, 그런 흉기를 더 날카롭게 가다듬고 감추는 일에 탁월한 보조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는 치를 떨도록 싫었더라.
*
하루하루 일상은 쳇바퀴처럼 굴러간다던 그 말이 맞다는 걸 새삼 깨닫는 오후 5시 30분. 도쿄로 이사 오고 나서 한결 느긋하면서도 이르게 바뀐 저녁을 준비하면서. 리아는 고요한 집안 분위기에 느릿한 몸짓으로 두 눈 가득 홀로 있는 집을 담았다. 미야기와는 달리 이곳은 너무나 한적하고 쓸쓸했으며 외로웠다. 항상 소란스럽고 온기 넘쳤던 사촌의 집과는 너무도 달랐다.
언제나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보냈던 시간을 혼자 보내기 시작하니 그 빈자리가 허하더라. 혼자 먹는 밥은 쓸쓸하고 속을 괴롭힐 뿐이었다. 한 달이란 시간 동안 그녀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알았다. 아침도 서로 엇갈린 시간 탓에 먹지 못했고 저녁조차 퇴근 시간이 유동적이라 함께 한 것은 다섯 손가락 안에 겨우 꼽을 정도였다.
"…초밥 먹으러 갈까나."
곱게 시금치를 다듬던 손이 멈췄다. 찬 물에 손을 헹구고 주머니 속 항시 보유중인 핸드크림을 바른 그녀는 그대로 지갑하나, 중학교 시절 오이카와에게서 뜯은 져지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섰다.
고요한 것은 싫었다. 항상 시끌벅적한 곳의 중심에 있었던 그녀로서는 이러한 조용함이 낯설게 다가왔다. 묵직하게 어깨를 짓눌렀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 싫-다.”
새삼스럽게 옆으로 돌린 고개에 시끌시끌하던 빈자리의 허전함이 느껴져서. 그녀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 고운 색으로 덧칠해 물들인 입술을 깨물어 짓이겼다.
한동안은 괜찮더라니, 학교라는 곳에 다녀오고 나니 그리움이 더욱 더 크게 다가왔다. 벌써 익숙해졌으니 걱정 하지마, 라 쏟아지는 걱정을 외면하고 일축했던 것이 바로 엊그제인데도. 그녀는, 절로 차오르는 외로움과 그리움에 씁쓸한 마음을 길게 내쉰 숨에 얹어 몰아내려 애를 섰다.
하지만, 졌다. 그녀는 졌다. 눈앞에 이지러지는 노을에 부신 눈을 가리면서. 떨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짓이기던 그녀는 이내, 손을 들어올려 마른세수를 했다.
"보고 싶네."
이번만, 먼저 전화해주는 거야. 이번만. 이번만, 아니- 사실은 너무나 보고 싶어서, 네가. 그래서 하는 거야. 이번만,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에 변덕으로. 너에게.
달싹인 입술 사이로 스민 숨결이 퍽 뜨겁게 달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