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기행(紀行) 06
제법 거리가 어둑어둑하다, 어느새 시내로 빠져 나온 것인지 휘황찬란한 거리가 소란스러워 귀가 먹먹하니 아프다. 영 좋지 않은 느낌만 계속 속에서 몰아치고 있어서 더 이상 걸으면 위험하겠다 싶어 적당히 바로 코앞의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갔다. 무얼 시킬까, 고민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치즈버거 하나, 바닐라 쉐이크 하나 딱 시키고는 지갑을 꺼냈다. 현금은 관리하기가 귀찮아 받은 체크카드로 결제하니 주변에서 닿았다 사라지는 시선이 느껴졌다.
설마 카드 쓰는 학생 처음 봤다고 저러는 건 아니겠지, 설마.
떨떠름한 기분을 뒤로 던지고 창가의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멍하니 어둑해진 거리에서 빛을 발하는 간판과 자동차들을 보다 문득 핸드폰이 생각나 가방을 뒤적여 쑤셔 넣었던 배터리를 꺼내 들었다. 핸드폰의 본체는 주머니 속에 넣어놨으니 다시 조립해 끼워 맞추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좀 오래된 기종이라 켜지는데 시간이 걸려 한쪽으로 밀어두고 턱을 괸 채 밖을 구경했다.
패스트푸드점의 좋은 점은 이렇게 혼자 와서 앉아도 될 만큼 자리가 많고 갑갑한 느낌 없이 탁 트인 공간이 있다는 것 정도일까. 아, 제법 음식이 빨리 나오는 것도 포함해야겠네. 지잉지잉 울리는 진동 벨을 들고 가 트레이를 받아왔다. 적당히 고소하고 적당히 느끼한 치즈버거에 이 프랜차이즈 종종 애용해야 겠다, 생각하고는 바닐라 쉐이크에 빨대를 꽂아 한 모금 쭉 빨아올렸다.
달달하게 넘어가는 시원한 느낌이 퍽 부들부들해서 기분이 좋았다.
"─저건 또 뭐야."
그래, 딱 그 정도까지였다면 정말 기분이 좋았을 것 같았는데. 저 멀리서 하얀 옷자락 휘날리며 뛰어오는 새끼가 내가 아는 그 새끼가 아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험악한 얼굴 가득 매달린 걱정이 또 안 어울려서 허, 비웃음을 흘렸는데.
그 뒤로- 잇세이까지 있고 이름 모르고 얼굴 모르는 녀석 둘이 더 붙어 있는 것에 딱딱하게 몸이 굳어감을 느꼈다.
저 새끼 무슨 짓을 한 거야, 도대체.
*
그래서 결론을 말하자면 하나마키 개새끼는 내게 화를 퍼부으려다 오히려 내가 먼저 나서서 욕설과 어떤 미친 짓을 한 거냐고 퍼붓자 그 기세 그대로 주춤거렸다. 그런 녀석을 뒤로 하고 먼저 나서서 말한 것은 잇세이로, 하나마키 녀석이 아까 전 그대로 헤어지고 나서 계속 어딘가 좀 찜찜해서 전화를 했더니 핸드폰이 꺼져있다고만 하고 어찌 저찌 알아낸 집전화로 연락하니 나는 안 왔다고 하고. 나름대로 걱정 되서 결국 마음은 다른 곳에 가있는 부활을 겨우겨우 끝내고 이렇게 찾아 나선 것을 잇세이와 그들 뒤의 두 사람도 함께 도와줬단다.
그러니까.
"민폐 제대로 끼쳤다 이거네?"
하나마키, 어디까지 바보인거야 너는. 작게 혀를 차며 팔짱을 낀 채로 자리에 앉아 있자니 불편한 듯 보이는 잇세이의 씁쓸한 미소, 그 뒤로 낯선 두 녀석의 불만어린 표정에 푸욱 한 숨을 쉬며 여전히 닥치고 있는 하나마키 녀석을 뒤로 하고 잇세이에게 지갑을 꺼내 던졌다. 어디 안 맞고, 떨어뜨리지 않고 제대로 받은 잇세이는 제가 받아놓고도 어리둥절한 표정이라서 비식 웃으며 턱짓을 했다.
"배고플 거 아냐, 가서 사와. 어쨌든 나 때문에 시간 허비했으니 밥 정도는 사줄게. 따로 움직이기는 귀찮으니 정크 푸드지만, 뭐어-. 선수라고 해도 하루 정도는 이런 거 먹어도 나쁘진 않아.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잖아?"
그래도 걱정된다 싶으면 적당히 샐러드 쪽으로 골라도 상관없어. 돈 쓸 일 없어서 용돈은 넘쳐나니까.
바닐라 쉐이크를 잡고 빨대 끝을 잘근거리다가 쪽 빨아올리니, 얼떨떨한 기색의 잇세이가 뒤의 두 녀석을 끌고 갔다. 그 모습을 빤히 보다 데구륵 굴린 시선의 끝에 잡힌. 저 망할 녀석은 갈 생각 없이 기어코 내게 잔소리란 것을 퍼부을 작정인 모양이었다. 비어있는 내 옆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앉는 것에 심드렁하게 보다 다시 한 번 모르는 척 바닐라 쉐이크를 쪽 빨아 올렸다.
"왜 또 말 안 했냐, 넌."
"뭘."
"아저씨 재혼하신거."
"일일이 보고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아주머니는 알고 계시던데, 아주머니가 말 안하셨으면 네가 안 듣는 게 좋아서 그러신 걸 텐데 알면서 묻는 건 무슨 심보니? 굳이 내게 그 깊은 뜻을 꼭 내가 나서서 해쳐 달라는 말은 하지 마렴.
나른하게 말하며 빨대를 붙잡아 휘저었다. 몽글몽글, 달콤하면서 부드러운 느낌의 액체가 빨대를 타고 흘렀다.
녀석의 눈이 가늘어 졌다.
우리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
어느새 다 해치운 바닐라 쉐이크에 한 잔 더 시킬까 고민하고 있자니 잇세이와 이하 둘이 돌아왔다. 트레이까지 들고 온 것을 보아하니 그냥 기다리다 온 모양이었다. 분명 옆의 녀석 때문에 적당히 자리를 피해준 것이겠지. 그게 퍽 마음에 들지 않아 잇세이가 지갑을 돌려주기가 무섭게 하나마키의 옆구리를 찔러 넣었다. 윽, 소리를 지른 녀석이 사납게 바라보는 것을 비웃으며 잇세이에게 돌려받는 지갑을 그대로 그 얼굴에 던져 주었다. 녀석은 예상대로 손을 들어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윽! 야!”
"응, 나 바닐라 쉐이크."
"하! 네이네이, 알아 모시겠네요."
하나마키의 옆에 와서 자리에 앉은 잇세이가 종이쪼가리 하나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어련히 알아서 주문했겠거니 싶었지만 그가 준 영수증을 보니, 정확하게 세트메뉴 3개만 결제 되어 있어서 픽 웃음을 흘렸다. 저가 무시당했다는 것을 눈치 챈 하나마키가 난리치려 할까 싶어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니, 덩치도 큰 사내새끼가 움찔 거리다 이내 말없이 지갑을 들고 카운터로 향하더라. 재미는 없었지만 이런 곳에서 사고 치면 귀찮아지는 것은 나이기 때문에 아쉬움은 삼켰다. 다만 철들었네, 라 말을 툭 던질 뿐이었다. 그에 잇세이가 희미한 미소를 짓고 그 뒤의 둘 중 엷은 갈색에 가까운 머리를 가진 녀석이 킬킬 웃었다.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근데- 너희들 그 정도로 되는 거야?"
"응?"
"아-아니. 콜라 하나에 버거 단품만 30개 쌓아놓고 먹는 녀석을 봤거든."
"…하아?"
"아키타에서. 명물이야, 그거."
그래, 그 녀석은 아키타에서 이미 명물이 되 버린 녀석이었다. 2미터가 넘는 거신병 주제에 하는 짓은 귀여운 척, 귀여운 척, 귀여운 척. 5남매에서 막내 포지션이니 이해는 됐지만 정도가 있지, 토토로 뺨치는 새끼 주제에 그리 아양 떨면서 매달리는 것은 취향이 아니었다. 그냥 딱 큰 개새끼 어거지로 목줄 잡아 기르는 기분이었지. 물론 그쪽은 내가 동생이라고 반대로 생각했을지 몰랐지만, 실상 주변에서 보는 것도 내가 말한 것이 정확했다.
심드렁하게 턱을 괴고, 다리를 꼬았다. 잇세이가 곧장 저지를 벗어 건네는 것에 괜찮노라 말하려다 엄한 그 표정에 입술을 삐죽이며 다리 위에 덮었다. 따뜻한 촉감에 부들부들한 저지가 무릎을 덮으니 어쩐지 시선이 조금 줄은 느낌이었다. 그건 고마웠지만 그래도 불편한건 불편한 거니까,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거렸다. 배려는 알지만, 그래도 영- 어색하달까.
"너는 엄해."
"네가 너무 경계심이 없는 거라고 생각 안 하는 거야?"
"하아? 난 경계심이 너무 심해서 힘든 녀석이란 소리만 듣고 살았다고?"
실제로 아키타에서 그리 들으며 도움이 필요할 때까지도 오기부리지 말라고 잔소리와 함께 엄청난 뒷감당을 져야 했다. 여하튼 잇세이는 그 말을 듣더니 괴상한 얼굴을 짓고는 이내 픽 고개를 돌려 버렸다. 더 이상 이 주제로 말해도 듣지 않을 거라는 그 행동에 여즉 어릴 적의 버릇이 남아있었나 픽 웃고는 그 뒤에 흥미롭게 이쪽을 바라보는 그 갈색 머리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씨익, 서로 짓는 여우 표정이 너무나 닮아 있어서 오싹한 소름마저 돋았다. 저 녀석, 마음에 드는데- 어쩐지 정말 깊이 친해지고 싶은 타입은 아니었다. 물론 난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지, 주변의 잇세이나 하나마키를 보면- 꽤 착한 녀석인 모양이지마는. 랄까, 나와 관련된 일을 둘이 부탁할 정도면 정말 착한 녀석일 것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일단 난 이 두 사람의 약점이란 포지션을 맡고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힐긋 옆에 하나마키의 자리를 비워두고 창을 앞에 둔 채로 일렬로 앉은 이들을 살폈다. 꽤 지친 모양인지 버거부터 해치우는 모습이 천상 고등학생이다.
"야."
트레이를 들고 온 하나마키가 자연스럽게 방금 전까지 그의 자리였던 내 바로 오른켠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것에 당연하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가 지갑과 바닐라 쉐이크를 건네주고는 나는 반절 정도 먹은 치즈버거를 녀석의 트레이 위에 올려놓았다. 한숨 쉰 녀석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것부터 먹는 것에 이번엔 감자튀김을 한 조각 뺏어서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본 녀석이 케찹을 트레이의 구석에 짜주었다. 다음 감자튀김은 거기에 찍어 먹었다.
"헤에- 둘이 사귀는 사이 맞지? 오이카와 상의 느낌이 그러하다구~"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하나마키와 눈이 마주치고는 이내- 우리 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잇세이에게 향했다. 그에 오이카와라는 그 갈색 머리칼의 녀석과 그 옆의 검은색 머리칼의 녀석의 시선까지 그에게 향했고, 얼결에 네 사람분의 시선을 받게 된 그는 사레가 들렸는지 잔기침을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