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행

새벽 기행(紀行) 04

 아힌 2015. 7. 5. 04:02



궁금한 것은 맞았다. 하지만 얼굴을 마주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직은.

 

*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옆에 선 네가 긴장으로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하기사 이리 밀착했는데 안 느껴질 리가 없지. 피아노 건반을 누르듯 부드러이 손가락 끝으로 손등을 두드리다 이내 그 부분을 꽃잎을 만지는 것 마냥 어루만지듯 문지르다 꾹 눌렀다. 긴장으로 굳어진 몸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고 심통이 나서 작게 혀를 차니 또 다시 바짝 굳는다.

 

이거, 재밌네?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오랜만."

 

 

긴 침묵과 묘한 긴장으로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트린 건 너였다. 잇세이, 한 때 내 형제였던 그런 존재.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마치 버릇인 것 마냥, 그렇게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부러 분위기를 느리게 바꿨다. 속이 불편했다. 꽤 따뜻하게 먹었던 아침이 담긴 속이 울렁이는 것이 집에 가면 게워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불편한 사실을 눈치챈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완벽한’ 가족이 될지도 몰랐던 만큼 가까웠던 잇세이가 아닌 내 손을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너였다. 웃기게도.

 

그럼에도 너는 내가 원치 않았기에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더 네가 싫었다는 것을 아마 너는 모르겠지. 그 어쭙잖은 배려심에 내 속이 타들어가는 것을 너는 영영 몰랐으면 한다. 하나마키, 너는.

 

 

"너, 음. 많이 바뀌었네."

 

"좋은 의미로?"

 

"당연하지. 몰라볼 뻔 했어."

 

 

그러고 보니, 날 못 알아볼 뻔 했다는 말에 살짝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잇세이, 꽤 시간이 흐른 탓에 얘 또한 몸집이라거나 많은 게 변해 있었다. 문득. 옆에 서있는 하나마키도 그러했는데 어째서 얜 한 눈에 하나마키임을 알았고 이 녀석 또한 날 바로 눈치 챈 걸까?

 

보아하니 잇세이는 하나마키 자식을 보고 대충 날 추리해낸 모양이었지만.

 

…잠깐 왜 나랑 얘를 보고 추리해? 뭔가 이상한 게 기분 나쁜 걸?

 

 

"여긴- 어쩐 일이야? …엄마한테 듣기론 아키타에 있다고 들었는데. 학교는?"

 

"…편입."

 

 

이어지던 생각을 끊는 질문에 눈을 깜박이며 조금 느리게 답했다. 삼키듯 끊은 숨이 헛돌았지만, 이 정도야 뭐 티도 안 나게 감출 수 있다. 아키타 가서 늘은 것이라곤 역시 연기뿐일까.

 

 

"어디로?"

 

 

힐긋, 내려 본 시선은 교복에 향해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답이 되었는지 잇세이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걸로 우리들의 대화는 끝이었다. 서로 간의 오가는 대화 없이 그저 걷기만 하는 것에 어째서일까, 어색함보다는 차라리 진즉에 이럴 걸 하는 후회만 든다. 후회를 느낄 정도로 편안함을 느끼고 말았다. 그저, 그저 이것만으로도 우리들은 충분하다는 뜻인 걸까, 아니면 우리는- 딱 이 정도의 관계라는 걸까.

 

깊이 빠지려는 생각을 억지로 삼키며 슬슬 보이는 학교에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집으로 가는 길을 모르네.

 

 

"하나."

 

 

느릿하게 깜빡이던 눈을 데구륵 굴려 마주쳤다. 잇세이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어딘가- 불안하듯?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무언가에 툭, 하고 닿았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옆에 서있기만 하고 침묵에 빠져 버린 그 녀석이었다. 힐긋, 잇세이의 시선이 내가 아닌 다른 쪽에 닿았다가 다시 내게로 왔다.

 

어딘가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어 모르는 척 흘려 넘겼다.

 

 

"언제부터 학교에 나올 생각이야?"

 

"적어도 이번 주는 아니야."

 

개학한지 벌써 1주일이 지나고 딱 2주째의 첫 번째 날, 이제 내가 편입하게 될 날은 바로 다음 주인 3주째의 첫 번째 날이 되지 않을까. 아직 서류는 정리 중이고 그것을 제출하는 것은 생물학적 아버지의 시간이 비는 날이 될 터이니. 두 번째 새 어머니, 라고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 그 분이 날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쉬이 생각되지 않으니…. 필히 그 언저리 쯤이 되리라.

 

 

"그래, 그럼 편입하고 나서 연락 줘."

 

 

미리 말하건대, 나는 이미 초등학교 6학년에 핸드폰이란 존재를 손에 쥐었고 그때 만들었던 번호는 단 한 번도 바뀌지 않고 여즉 사용 중이었다. 고로 이 녀석들은 내게 연락을 하라는 말을 해선 아니 되었다. 비죽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과연 무슨 뜻을 품고 있었던 것일까. 내가 흘린 웃음이것만 그 뜻은 나도 몰라서 그냥 계속해서 빙글 빙글 웃었다. 옆에 말없이 부목 겸 서있었던 하나마키의 어깨가 들썩였다. 비키라는 그 무형의 말을 무시할까 하다가 참고 고개를 바로 했다.

 

 

"그나저나 이제 학교니까 그만 헤어지는 게 좋지 않을까나."

 

 

알게 모르게 시선이 쏠려 있었다. 머리를 쓸어 넘겨 귓등 위에 꽂고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돌려 말하는 재촉, 무언의 압박.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쉽게 수긍하고 내 뜻을 따라줘야 할 잇세이가 말을 듣지 않고 모르는 척 버텼다. 나는 싫었다. 더 이상의 주목을 원치 않았고 울렁이는 속은 참기 곤욕스러울 정도로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들어갈 때야, 하나마키.”

 

 

팽팽하게 맞서던 우리 중에서 이긴 것은 나였다. 어쨌든 학생의 신분으로 등교를 하지 않으면 곤란한 하나마키와 잇세이와는 달리 난 비교적 자유로운 몸이었기에. 물론 집에 들어가면 두 번째 새어머니의 어색한 잔소리를 듣기야는 하겠지만, 그 정도야 충분히 무시할 수 있는 것이었다.

 

 

"너, 집 어디야."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샐쭉이 웃었다. 톡톡, 녀석의 어깨를 두어번 가볍게 두드리곤 가운데 손가락을 펼쳐서 보여 주었다. 도깨비처럼 일그러지는 얼굴에 그저 입가를 가리며 눈웃음을 흘리고는 유유히 여태 걸어왔던 길을 뒤돌아 거슬러 올라갔다. 이 정도만 해도 저 녀석은 필히 쉽게 속으리라.

 

가는 길이 편안했다.

 

 

조금 삥 돌고 돌아 겨우 찾아낸 집에 도착해 들어가자마자 서늘한 기운이 반긴다. 아무도 없음을 직접적으로 알리는 그 공간은 영 편안한 것이라서.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졸랑졸랑 주방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메모지 한 장이 냉장고에 붙어 있었다. 무슨무슨 약속으로 이런이런 곳에 가니 혹시 집에 왔을 때 없거들랑 이러이러한 것을 먹어라. 참으로 간략하고 정 없되 만족스런 메모지다. 서론이 너무 긴 것은 싫다, 이렇게 딱딱 본론만 거쳐 내놓은 것이 좋다. 우리 사이엔 이것이 가장 어울리니까.

 

관계의 심화가 없을 사이에서 정을 주고받는 것은 독이다, 그것은 독이다. 아주 지독한 독, 누구 하나는 망가질 때까지 중독 시켜 목을 조르는 독.

 

 

"그 녀석도 정리해야 하는데."

 

 

어째서일까, 분명 잘라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달라붙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거리를 두게끔 행동해도 오히려 파고들어 흔드는 것이 우리 사이의 공백기가 있음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지독한 녀석, 작게 혀를 차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거추장스런 머리를 잘라버릴까, 짧은 고민을 하며 냉장고의 메모지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물을 꺼내 벌컥 벌컥 들이켰다.

 

거실의 쇼파에 앉아 나른하고 잉여스런 킬링타임을 만들기 위한 프로를 찾았다.

 

별로 볼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