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기행(紀行) 03
어째서지, 왜 내가 너랑 걷고 있는 거지?
문득 잘 걷다가 든 생각에 와그작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하나마키 여사에게 인사를 남기고 집을 나온 것까진 좋았다. 그래, 딱 거기까지는. 그 다음에 우리는 말 그대로 각자 갈 길 갈 줄 알았더라. 어찌되었든 이 녀석과 나는 남남이요, 깊은 관계도 아니었으니까. 그래. 이미 3년도 전에 끊어진 그딴 깊은 관계, 이미 끊어진.
이미 우리 사이의 실날같이 얄팍한 관계는 끊어졌다. 지금의 이 관계는 그저, 그래 그저 단순하게 그리움, 반가움 등등이 중첩되어 일어난 단발성 관계.
"너, 길치? 어디 가는 거냐. 이쪽인데."
"…하아?"
"세죠, 가야할 거 아냐."
"내가 왜?"
"다닐 거잖아?"
손 놔, 잡힌 손을 빠르게 흔들었다. 거머리인지 떨어지지를 않았다. 날카롭게 쏘아보니, 능글맞은 미소에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짐을 느꼈다. 평정은 개뿔, 이딴 식으로 일방적으로 구는 자식에게 배려는 개뿔.
"하! 내가 다니면 피곤할거라고 한건 어디의 누구씨더라."
"그럼 그 앞에서 당연하다고 했어야 했냐? 그럼 죽이려 들거면서."
"잘 아네. 근데도 이래?"
"넌 나 없으면 안 되거든."
"…하?"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리면서. 아까 전의 러닝복과 달리 제대로 차려입은 교복, 약간은 젖은 감이 있는 머리칼, 어딘가 시원한 비누향.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붙들린 손목을 내려 봤다. 흔들었다. 녀석은 떨어지지 않았다.
"돌았니? 아니구나 내 실수, 넌 이미 돌았어."
"그건 또 무슨 개 소리야."
"어디서 개가 사람 말하네."
왈왈 짖어봐라, 왈왈.
손목에 떨어뜨렸던 시선을 들어 올리며 활짝 웃고는 그리 말했더라. 개소리 타령을 하는 너에게, 개처럼 짖어보라고 그리 활짝, 깊은 분노를 담아서. 녀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쯤하면 되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나는 내 갈 길, 그러니까- 생물학적 아버지라, 그 자식인 날 훈육할 권리가 있노라 우기고 있는 그 아버지의 집에 갈 생각이었다.
근데 여전히 손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됐고, 가자."
그래, 그게 끝이었다. 너는 그대로 나를 잡아끌었고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허리를 낚아채 잡아 돌리면서 그대로- 너의 길로 끌고 가더라. 진심을 다해 놓으라 말하니 허리를 잡은 손까지만 놓고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이 기어 내려와 억지로 손을 벌려 깍지 꼈다.
이거, 추행이라고 신고 못하나.
*
녀석의 집과 학교의 거리는 제법 되었다. 가는 길 내내 고요했던 거리 속에 속속들이 옆에 선 너와 똑같은 교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자애, 남자애. 누구 하나라고 콕 찝을 필요도 없이 그들은 옆에 선 너를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너를 보고 수군거리곤 나를 보곤 다시 너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퍽 불쾌하게.
"인상 풀어라."
"누구 때문인데."
"그냥 네 기분이 더러운 걸 꼭 누구 때문이라고 탓하지는 마라 좀."
"하. 지랄도 작작 해."
"─넌 여자애가 어떻게 된 게 입이 그렇게 험해."
"보탠 녀석이라고 해서 그 주둥이 싸돌리라고 내버려 두고 있는 거 아냐. 닥쳐."
퍽 사납게 일갈하니 그제야 입을 다무는 게 전과 달리 좀 눈치란 것이 생긴 모양이었다. 징글맞은 자식 같으니라고. 작게 혀를 차며 자꾸만 닿는 시선에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환히 웃었다. 눈에 독기가 나올 기세의 계집애 하나가 움찔하더니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그러게 어디서 덤벼, 얼굴도 못생긴 게. 심드렁하게 얼굴을 풀며 중얼거렸다.
아직도 옆에 있는 네가 성질 한 번 더럽다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짜증이 일어 깍지 낀 손에 힘을 줘 손톱을 세웠다. 굳은살이 딱딱하게 박여 조금 거칠한 손바닥과 달리 매끄러운 손등에 사정없이 손톱이 눌렸다. 긁어내릴까 하다가 참았다.
"윽, 너-!"
"됐고, 잇세이는 어떻게 지내?"
"…내가 왜 말해줘야 하는데."
"싫으면 말아."
버럭 소리치려다 사람들의 시선에 수그러드는 것을 힐긋 보다 무심히 혀를 굴렸다. 내가 만들어내 밀어낸 말이 것만 어째 낯설다. 그래, 매우 낯설다. 어색했다. 흐응, 짧은 비음을 흘렸다. 어딘지 석연찮은 반응에 슬쩍 고개를 틀어 바라보니 맞춰서 고개를 돌리는 네가 있었다.
역시나- 찔리는 게 있구나, 너.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작게 흘리니 움찔거리는 몸이 노골적이다. 손을 풀 것이라고 흔드니 오히려 더 꽉 쥐는 것에 눈가를 찡그렸다가 이내 힘을 뺐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거슬리게 구는 저것들을 골려 먹는 것이 더 신나니.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곱게 눈을 휘었다. 여전히 사나운 시선의 계집들이 눈에 밟혔다. 그래봤자 내 발치에도 닿지 않을 못난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