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10cm의 용기가 있었다면 5
꽃다이 웃는 모습이 퍽 예뻐서. 자꾸만 시선이 가서. 행복해지라고 염원을 담아 대신 기도해 줄 만큼 어여쁜 사람이라. 부디 그 행복이 오래가길 바란 것은, 아마도 그녀는 모를 테지. 한낱 어린 날의 추억을 그렇게 홀로 곱씹다가 그녀를 위해 내던진 것을, 그녀는 모를 테지.
“예쁜 사랑해라. 오리하라.”
“어머, 그건 이자야한테 하는 말 같잖아 도타칭!”
“하아. 너나 그 녀석이나 둘 다 똑같은 오리하라니까, 그걸로 충분해.”
“너무해라- 나 같은 미녀를 이자야랑 동급취급하다니.”
꺄르륵 말간 웃음 속에서 너는 여전한 꽃이요, 소녀였다.
*
이자야는 가벼운 인사를 끝내고 임시지만, 생글생글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일단은 임시라고는 하나, 그에게 배정된 자리로.
“─후아.”
겨우겨우 자리에 앉고 나니, 조금 간격이 있던 탓일까 끊임없이 이어지던 매서운 시선이 누그러졌다. 아니, 가려진 것인가. 피식 웃은 그는 분명 조금만 더 있었다면 그 강렬한 눈빛에 저가 구워졌거나, 혹은 목 졸렸을지 모른다며 장난기 어린 숨을 내뱉었다.
미리 말을 하지 않고 온 것은 다름 아닌 서프라이즈에 대한 배율이 높았지만, 기실 그녀의 저런 반응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사랑스런 그의 사촌 누이의 무의식이 장악한 포커페이스는 무척 단단해서 이런 식의 서프라이즈가 아니고서야 그 속에 숨겨진 것을 보기 힘들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본 당황한 표정에 썩 만족스런 웃음을 매달 수 있었다.
다만 무려 세 달 전부터 물밑에서 열심히 작업한 결과를 코앞에 두고 어제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지만 않았다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연출되지는 않았을 테지만.
"으음- 릿쨩은 너무 얼굴에 확 들어 난다니까아-."
비록 다른 사람은 못 알아볼 정도로 티가 안 나지만 그가 누구인가, 그 오리하라 이자야가 아닌가. 물론 그가 그녀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사촌이란 것도 추가해야 하지만, 어쨌든 그녀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묘하게 뿌듯해서. 그는 내심 한동안은, 아니 앞으로는 그녀가 더욱 많이 감정을 들어 내주길 원했다. 물론 되도록이면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보다는 그가 바란 당황한 모습이라거나 하는 귀여운 모습을 동반한 긍정적인 쪽의 감정을 보여주는 걸로.
"─이야."
미리 발급받은 교사들끼리 사용하는 메신저 아이디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메시지가 쏟아졌다. 혹시 몰라 미리 음소거 시켜 놓은 것을 기특하게 생각하면서 이자야는 저의 메시지 창을 테러시킬 기세로 오는 릿카의 메시지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다다닥, 타자치는 소리가 제법 떨어진 그의 귀에도 들릴 정도니 얼마나- 화가 난 걸까. 이자야는 오늘 집에 들어가기 전에 살기 위해서 그녀가 좋아하는 오코노미야키를 잔뜩 사가야겠다고 다짐했다.
*
한 체감 상 10여분 정도를 열심히 자판을 두드려 장문, 단문 다 섞인 메시지를 보내는데 성공한 릿카는 없는 땀을 닦아내며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제법 거리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시퍼렇게 변한 이자야의 얼굴을 보니 십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갈 정도라서 그녀는 만족스럽게 오전 수업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오늘의 첫 수업은 학년 말이지만 거의 예비 3학년 취급을 받는 2학년의 영어 수업, 그녀는 필요한 교재와 유인물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리하라 선생님, 수업?"
"아, 네. 오늘 첫 수업부터 예비 3학년들이에요."
"어유, 힘내요. 그 녀석들 공부하기 싫다고 반항이 심하더라고요."
"아- 어떻게 하죠. 벌써부터 걱정이네요."
"에이, 힘내요! 오리하라 선생님은 애들이 말 잘 듣는 편이잖아요."
"으,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엷은 미소를 짓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느긋한 마음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멀찍이 있던 이자야도 뭔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에 그녀는 곧 그의 첫 수업이 근처의 교실인 것을 떠올렸다. 확실히 이시다 선생님과 함께 얘기를 하며 2학년 층으로 움직였었으니, 분명 맞을 것이다. 그녀는 이따 살짝 그의 수업을 견학해야겠다며 종종 걸음으로 계단에 올랐다.
"어허, 거기. 누구야? 수업 종 쳤는데 안 들어가는 녀석!"
"으악, 하라쨩이다!"
"…너 얼굴 기억했다, 사카모토! B반 16번 사카모토 켄야! 너 감히 으악이라 했겠다!"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콕 집어서 말한 릿카는 씩 웃는 제자의 머리를 거칠게 헤집고는 그녀의 수업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 아이들이 가득한 교실로 향했다. 언제나 수업종이 치기 2분전쯤 미리 들어가곤 했던지라, 어수선했던 교실은 그녀의 등장에 다른 의미로 활기를 머금고 날뛰었다.
"이 놈드을-! 선생님 왔는데도 떠들고 있냐!"
"에-에- 선생님 아직 종 안 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치는 종에 스피커를 가리키며 활짝 웃은 릿카에 알아서 다들 제 자리를 찾아 착석했다. 이미 그녀를 겪어봤던 이들이었기에 반항하면 좋은 꼴 못보고 하루가 고달프다는 것을 B부의 O군을 통해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자, 교재는 꺼내라고 해도 가지고 있는 녀석들 없는 거 알고 있으니까. 유인물 돌린다, 한 장씩 받고 넘겨라?"
톡톡, 약간 묵직하게 느껴지는 종이뭉치를 교탁 앞자리의 학생에게 넘기니 알아서 세 등분해서 양쪽으로 넘기고, 본인의 분단에 유인물을 돌렸다. 하나 둘 저마다 종이를 받아가는 것을 확인한 릿카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은 채 간단한 필기를 위해 등을 돌렸다.
초록색 일색인 칠판, 기분이 묘했다. 그냥, 유난히 오늘 더.
릿카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고는 칠판 밑에 달린 서랍을 열었다. 안에 빼곡히 자리한 분필 중 하나를 꺼내 손에 쥐니 하얀 가루가 손가락을 물들였다.
"오늘은 간단하게 시작해서 간단하게 끝낼 예정이니까 다들 딴 짓하지 말고 빨리 빨리 수업 나가서 쉬는 게 좋지-?"
"네에-!"
"오오! 세죠의 여신님 하라쨩 오오!"
"그래, 그래. 아부하는 건 좋은데 애인 삐질지도 모른다, 야마시타."
"켁, 그건-!"
"자, 시끄럽고. 모두 다 받았지-? 그리고, 거기-."
칠판과 분필이 부딪쳐 나는 소리가 멈췄다. 그 잠깐 동안 나눠준 유인물에 적혀 있지 않은 예문을 적은 릿카는 다시 몸을 돌렸다. 손에 쥔 분필이 부드럽게 감겨 들어왔다.
"오전이라 졸린 건 아는데 내 수업엔 자면 안 되지? 뒤로 나가 있어."
휙, 매끄러운 선을 그리며 떨어진 손에서 날라 간 분필이 퍽하고 목표지점에 떨어졌다. 엎드려서 자고 있었기에 제대로 정수리에 얻어맞은 머리는 마치 눈을 맞은 것처럼 정수리부분만 하얗게 물들었다. 근 1여년 가까이 봐왔던 광경이지만 정말이지 적응 안 되는 멋진 투수자세라며 야구부의 주장, 타지마의 눈이 반짝였다.
"어머, 분필이 왜 다 부러져 있데?"
물론 범인은 한 사람이다. 분필을 투척무기로 쓰는 사람은 아오바죠사이에선 오직 한 명뿐이었고, 특이하게도 필기는 부러지지 않은 온전한 것을 쓰면서 던질 때만큼은 멀쩡한 분필까지 두 동강내서 던져버리는 탓에 릿카가 부임하게 된 이후로 아오바죠사이의 분필 소모량이 매우 늘었다.
"음- 뭐, 오늘은 내가 가지러 가볼까. 너희들 나눠준 유인물에 예제랑 문제 있는데 예제 다 풀어보고, 문제 3번까지 풀어보렴. 교무실 갔다 올 동안 시끄럽게 굴지 말고. 반장, 얄짤 없이 떠드는 녀석들 이름 적어서 내. 괜히 모르는 척, 한 번 봐준다고 넘기지 마렴. 알지-? 난 언제나 연대 책임인거?"
손에 묻은 분필가루를 탁탁 털어내고 걸음을 옮기면서 손가락을 까딱거린 릿카는 앞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고개를 틀어 안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자아- 이제부터 조용히 문제 풀고 있어? 나즉히 울린 말에 아이들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흐음- 교무실까지 가야하네. 귀찮아라."
통통 뛰는 듯 가벼운 걸음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긴 릿카는 교무실로 향하는 계단을 지나쳐 쭉 지나갔다. 살짝 올린 고개로 반을 확인하고 귀를 기울이니 문틈 사이로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반한 얼굴에, 듣기 좋은 목소리까지. 성격만 빼면 정말 탐나는 이케멘인데. 작게 중얼거리며 문 옆의 벽에 살짝 기대니 우연히 창문가에 앉은 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배구부의 학생이었다. 이름이 유다였던가. 릿카는 쉿, 입술 위에 검지를 세우며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흘렸다. 친절하게 창문까지 살짝 열어주는 배려에 고맙다, 엄지를 위로 세운 그녀는 조금 더 잘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야. 자, 그럼 다음 질문?"
사실 화가 난 것은 아파서 쉬고 있어야할 놈이 이곳에 와있다는 것 때문이었지, 선생으로서의 이자야는 낯설어서. 조금 궁금했다. 과연 잘할까 같은 느낌보다는 잘 하기야는 하겠지만, 이상한 성격 들켜서 사고 치지나 않을까 하는 그런 걱정어린 느낌에 가까웠지만.
"저요, 저-! 쌤! 하라쨩이랑은 무슨 사이에요?"
"에? 하라쨩?"
"네! 오리하라 릿카 선생님이요! 우연히 성만 같은 건가요, 오리하라쌤?"
릿카는 익숙한 목소리에 서둘러 고개를 틀어 안을 바라봤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굴이 아주 신이 났다. 창문을 열어줬던 착한 학생, 유다가 낄낄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멀리, 오이카와의 뒷자리에 앉은 이와이즈미가 한숨을 쉬며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는 것도 보였다. 릿카가 저 장난꾸러기라며 바득, 이를 갈고 있을 때 이자야의 입이- 열렸다.
"어떤 사이라고 해야 할까- 아주 깊은 사이라고 해야 할까-?"
"엑-? 선생님 더 자세히 얘기해주세요!"
"맞아요, 쌤!"
"하라쨩은 우리들의 만인의 여인이라고요! 쌤 제발 아니죠!?"
"으음- 특별한, 사이라고 해둘까-아나-?"
좋아, 거기까지. 남의 혼삿길 다 막을 작정으로 끼부리는 녀석에 릿카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드르륵 쾅, 힘차게 열어젖힌 손에 순식간에 교실에 침묵이 살랑살랑 내려앉았다. 손을 들고 제일 크게 난리를 치던 오이카와는 야차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릿카의 등장에 황급히 손을 내리고 뻣뻣한 자세로 자리에 착석했다. 교탁에 허리를 굽혀 기대고 있던 이자야 또한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얼굴로 급히 뒤로 세 발자국 물러났다.
환히 웃는 모습이, 가히 야차의 미소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오, 리, 하, 라, 이-자, 야-구운-!!!!!"
처음엔 가볍게 걸어가던 걸음은 빠르게 바뀌더니 한 번의 도움닫기에 힘입어 뛰어올랐다. 그날 2학년 D반에 최대풍속이 초속 23미터인 중형 태풍 헥토파스칼이 오랜만에 등장했다
"이 병신이!"
"크억, 후, 훌륭한- 발차기 였…."
일단 부상자인 이자야는 방어와 동시에 격침했다. 분노한 릿카의 씩씩 숨을 몰아쉬는 소리만, 교내에 울려 퍼졌다. 오이카와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한 채로 먼 산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는 이미 해탈한 모습으로 덜덜 떨고 있었다.
"…짜, 짱이다."
"꺄아아악, 오리하라 선생님이 오리하라 선생님을 걷어찼어!?!?!?!??!?"
"아, 시발."
오리하라는 조용히 두 손에 고개를 묻었다. 그래도 제법 내숭을 떨면서 왕년에 날리던 성격 숨기고 그럭저럭 조금 무섭지만, 장난기 많은 선생님 정도로 통하던 이미지가 그대로 날라 갔다. 그대로, 뻥 날라 갔다.
숨기고 있던 성격이 뽀록난 릿카도 울고, 상처에 제대로 직격 당한 이자야도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