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10cm의 용기가 있었다면 4
오리하라 릿카와 타케다 잇테츠는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참 잘 어울리는 사이라고, 이자야는 생각했다.
“이자야.”
“─그래, 타케다라고 했던가? 릿카를 잘 부탁해. 울리지 말아줬으면 좋겠는 걸? 릿카는 우리 오리하라의 공주님이니까.”
자신의 사촌 누이가 장장 20살이 되어서야 경험하는 첫사랑치고는 제법 번듯한 사람을 골라서. 그는 몇날 며칠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결국. 그에게. 저의 소중하고도 귀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보물을. 기꺼이 내주기로 했다.
“얘는! 무슨 그런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어! 테츠, 듣지 마!”
“아하하, 확실히 릿카는 공주님이죠. 절대 울리지 않을게요.”
“흐-응.”
그의 옆에 선 그녀가 처음 보는 아주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사촌누이는 참으로 어여뻤다.
*
등교하는 내내 저의 이름을 부르거나 선생님을 외치며 인사하는 학생들에게 미소와 함께 짧은 인사를 건넨 릿카는 학교의 정문을 넘어서기가 무섭게 울리는 핸드폰에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른 등교시간부터 누가 연락을? 혹시 이자야인가 싶어 걱정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올린 그녀는 이내 핸드폰이 울린 이유를 확인하고는 상큼한 미소를 얼굴에 걸었다.
곧장 학교 본 건물로 향하던 걸음을 휙 돌려 체육관으로 향하는 그녀의 뒤로 넘실넘실 어두운 무언가가 보이는 듯해, 몇몇 학생들이 눈을 비비는 일이 있었지만 그녀는 모를 일이었다.
아침부터 기운찬 운동계 학생들이 몰려 있는 체육관은 멀리서도 우렁찬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 서, 오이카와 토오루."
"─앗차차, 하라쨩?"
"그래, 나다 이 눔아. 또 땡땡이냐! 허구한 날 주장이란 놈이 이렇게 허파에 바람들은 짓 하니까 애들도 따라하려고 하잖아!"
저보다 큰 오이카와에 깨금발까지 짚어 그의 귀를 콱 낚아챈 릿카는 저를 향해 아우성치는 여학생들을 슥 훑어봤다. 학년을 표시하는 넥타이에 달린 핀이 아직 초록색인걸 보아하니 이제 곧 2학년으로 올라올 예정인 파릇파릇한 1학년생인 모양이었다.
하기사, 1학년이 아니고서야 2,3학년들 사이에서 유명한 그녀의 얼굴을 모르고 이렇게 덤빌 리가 없었다. 1학년 수업만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버릇없이 기어오르는 건가, 릿카는 아예 내년부턴 1,2학년만 담당해야겠노라 곱씹었다. 그 사이에 여학생들에게 다급하게 손을 흔들며 다독이는 오이카와의 모습에 기가 차 잡고 있던 귀를 더 붙잡아 트는 소소한 보복도 가하면서..
"아악-! 하라쨩, 아파! 아파팟-!"
"아프라고 하는 거지, 그럼 안 아프라고 하는 거니?"
여전히 여학생들에게 시선을 던지고서. 릿카는 활짝 웃는 얼굴과 상냥한 음성을 내고 있었으나, 오이카와 쪽으론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제법 화가 많이 났음을 깨달은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아픈 귀에 끙끙, 앓으며 조금이라도 덜 아프기 위해 그녀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다만 그 행동이 최대한 덜 아프기 위한 발악이었다고는 하나 이미 그 사실을 눈치 채고 있던 릿카에게 있어서 오히려 귀를 잡아 비틀기 쉬운 행동이었음을 그는 몰랐을 뿐이었다.
"아침연습에 한창 열중해야할 사람을 불러낸다는 생각은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거니?"
"무슨 상관이에요! 빨리 오이카와 선배 귀 놔주세요! 아파하시잖아요!"
"마땅히 받을 벌이니까 얘도 닥치고 받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니 그 건방진 소리는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끝내주지 않을래?"
분명 사근사근한 부드러운 톤으로 말하고 있지만 귀에 와 닿는 말이 무섭다. 그저 소리만 듣고 있는 오이카와는 저의 무서움이 이 정도일 텐데, 그녀의 얼굴을 보며 듣고 있을 소녀들은 오죽할까. 그는 그녀들의 두려움을 지레짐작해보고는 안쓰러움에 눈을 돌렸다. 저를 좋아해준 죄 밖에 없는 불쌍한 아이들이라 두둔해봤자 오히려 릿카는 가차 없이 무지막지한 벌을 쏟아낼 것이었다. 이미 전적이 있었던 그로선 여기서 침묵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임을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연례행사도 아니고. 엄연히 너희들보다 손윗사람인데다가 교사의 입장인데. 예의는 갖춰주지 않겠어? 버릇없는 것도 정도 것이어야지, 이건 너무하잖니."
"아, 진짜 무슨 상관이냐고요! 내가 좋고 선배가 좋은 거잖아요! 대신 좋아해줄 것도 아니면서 신경 쓰지 말라고요! 어차피 우리 담임도 아니면서!"
"아항. 담임 선생님이 아니라서, 말을 안쳐들으시겠다- 이거니? 허유, 정말이지…. 그 버르장머리 싹수가 아주 노래서 짜증나네, 너희들.“
“꼰대질 하지 말라고!”
조만간 1학년 담당 교사들이 왕창 깨지겠다는 것에 마음속으로만 성호를 그으면서 오이카와는 제발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고, 바라고,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마음을 모르는 모양인지 파드득 따라오는 여학생들의 반발에 그는 눈물을 머금고 나즉한 통증의 신음을 흘려야했다. 귀를 붙잡아 비틀던 손이 뺨으로 노선을 틀었다. 더욱 아프게 쥐고 비트는 것에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참을 수 없었다.
“아윽!”
"오리하라 쌤-!"
"─하나마키군?"
"아 쌤, 오이카와 잡으셨네요. 오이카와 아직 안 왔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아아, 여기서 잡았거든. 곧 들어갈게."
"─네, 감독님께 전할게요."
우연히 마주친 하나마키와의 시선에 오이카와는 간절히 도움을 요청해봤지만, 그의 소중한 친구이자 팀 메이트는 그에게 가차 없이 외면한다는 답을 돌려줬다. 그에 오이카와는 울상을 지었다. 점점 볼을 잡아당기는 손길이 매워졌다.
"하아. 이쯤하자. 훠이훠이, 너희들 다 가버려. 당장."
끙끙 앓고만 있던 그 찰나의 순간, 영원 같았던 지옥이 끝났다. 접착제 마냥 달라붙어 있던 릿카의 손이 뚝 떨어진 것이다. 오이카와는 감동의 얼굴로 볼을 감싸 쥐고 숙였던 허리를 들어 올리며 여학생들에게 서둘러 손짓했다. 한동안 릿카가 아침연습에 참석하지 않아 1학년들의 꼬드김에 넘어간 것이 실수였다. 그는 서둘러 이 실수를 만회하고자 애를 썼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그들에게도, 그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하지마는 좋아하는 사람을 앞에 둔 여학생들의 입장에선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고로, 그녀들은. 곧장 오이카와에게 달려들어 그의 고통을 어루만져줄 생각이었다. 즉, 릿카를 무시하고자 했다.
"당-장, 꺼지라고 했을 텐데."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의 목소리가 저리 섬뜩할까. 오이카와는 그의 어깨를 탁 짚으며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정말로, 그녀가 화났음을, 그는 눈치 챘다. 이젠 어떻게 넘어갈 수 있는 차원이 아닐지도 몰랐다.
"어, 어서 돌아 가주지 않을래? 오늘은 나 열심히 연습할 생각이라서! 마음은 고맙지만 미안해!"
"네에-? 너무해요 오이카와선배!"
"오늘은 저희랑 놀아주신다고 하셨으면서!"
"에, 에헤이- 미안해. 다음에, 다음에 놀아줄게. 응?"
"─칫, 알았어요, 선배.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하세요!"
"화이팅이예요!"
"그, 그래, 고마워-! 오이카와씨 힘낼게!"
정말 진심을 다해 고마워하면서 오이카와는 저 멀리 가는 여학생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일순 그녀들의 시선이 릿카에게 닿았다, 느낀 순간 그는 사정없이 옆구리에 꽂히는 손길에 아픔을 호소해야했다.
"으캬가갹!"
"태. 도. 분명히 내가 제대로 처신하라고 했을 텐데."
"크으, 잘, 잘못 했습니다, 하라쨩!"
"잊은 모양인데, 이제 너 3학년이야. 정신 차려. 이번만큼은 제대로 짓밟고 올라가야 할 거 아니니."
손길이 거두어졌다. 오이카와는 옆구리를 부여잡은 그 모습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소름끼치도록 차갑게 현실을 강조하는 그녀의 말에 입이 다물렸다.
"벌이야. 오늘 너 3대3 팀 대결 연습 시합 전부 제외할거니까 그렇게 알아."
"하라쨩-!"
"이렇게 될 줄 알면서 이딴 짓 한 거 아닌가? 오전 연습은 불참해도 오후 연습은 관전했어. 어차피 그때 알게 될 사항 지금 알고 이 정도로 그친 거니까 감사히 여겨."
찬바람이 일 정도로 휙 돌아서면서. 먼저 체육관으로 향하는 그녀의 뒤를 따라 가면서 오이카와는 입술을 삐죽였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맞지만, 연습이라 할지라도 시합에 나가지 못하는 것은 서러웠다. 애초에 뺀질뺀질 거리며 연습을 조금 나돌긴 했어도 그만큼 보충 제대로 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몸으로선 억울할 따름이었다.
"하라쨩- 너무해, 너무해-."
"혼자서 운동장 돌고 싶다고?"
"─하라쨩."
"왜."
"잘못했어요. 두 번 다신 연습 빠지는 일 없게 할게요."
"─그래도 안 돼."
단호한 말에 오이카와는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며 앞서가는 릿카의 뒤를 쫓았다.
*
누군가에게는 서글펐을지 모를 아침연습이 끝나고 릿카는 아침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급하게 소집된 회의는 출산휴가를 제출하고 잠시 몸을 풀러 간 이시다 선생님의 빈자리를 채워줄 임시교사를 소개하기 위함이었다.
"아, 이시다 선생님 축하드린다고 방문도 해야 하지 참."
사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일이 생길 줄은 몰랐기에, 미리 축하한다는 말 하나만 전했던 자신을 생각하니 부끄러워졌다. 릿카는 머리를 쓸어 넘겨 얼굴을 감췄다. 기실 축하는 하긴 했지만, 어딘가 샘나지 않던 것은 아니라서. 조금 차갑게 굴었던 것을 반성하는 중이었다.
"─하아."
이시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좋다며, 만삭이 가까워질 때까지 출산 휴가를 제출하지 않고 교단에 섰다. 사실 그런 모습은 그녀에게 있어서 조금 부러운 것이어서. 아니 애초에 '첫사랑'과 결혼하고, 남편과 같은 교단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꿈같은 이야기인지 그녀는 너무나 잘 알았기에. 그래서 오리하라는 이시다를 보며 많이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그랬더라. 비록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 할지라도 언제나 오리하라에게 있어서 이시다는 못마땅함으로 포장된 부러움이 잔잔히 깔려 있었기에.
"아아, 정말이지 꼴사납네."
그래, 그녀를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얼마나, 많이 부러워하고 또 부러워하며. 또 질투했던가. 만약이라는 이름하에 얼마나 많은 꿈을 꿨던가. 자꾸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가는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서 릿카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부럽다고 인정하는 것은 쉬웠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질척한 무언가가 가슴 속에 남아서. 진절머리 날 정도로 질척질척하게 달라붙어서.
릿카는 머리를 흔들었다. 복잡하게 엉킨 생각들이 튀어나가길 바라며 조금 세게 흔들고 나니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 했다. 그에 그녀는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어느 선생님이려나."
생각의 꼬리는 다른 곳으로 비틀렸다. 이시다 선생님의 갑작스런 출산으로 인한 공백을 채워줄 임시 교사가 누구일까, 궁금해 하는 쪽으로. 한 번 틀린 생각의 물꼬는 금세 가지고 있던 물을 쏟아내듯 여러 가지를 그녀에게 쏟아냈다. 몰려드는 호기심과 궁금함을 이겨내지 못한 그녀는 그저 걸음을 서둘렀다.
가까워지는 교무실, 하나 둘 보이는 동료 교사.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회의실에 걸맞게 생긴 자리에 앉은 순간 불편함을 느꼈다. 어딘가 쿵, 쿵- 엇박으로 뛰는 심장에 입술을 핥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이것은-
"자자, 모두 다 착석했습니까?"
불안, 함일지도.
시간이 흐르고, 빈자리들이 속속들이 채워질 무렵. 문이 열리고- 교감선생님과 교장선생님, 그리고 익숙한 얼굴의 사람이 들어왔다. 릿카는 경악으로 물들었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살짝 시선을 밑으로 떨구고 여린 살을 계속해서 깨물어 차오르는 욕설을 집어 삼켰다. 치마 위에 가지런히 모은 손이 저절로 굽어 주먹 쥐어져 흔들렸다.
"여기는 이번에 이시다 선생님을 대신해서 임시로 자리를 맡아줄 오리하라 이자야상 입니다."
"안녕하세요, 앞으로 세달 간 잘 부탁드립니다."
분명 집에서 쳐 자고 있어야할 얼굴이 뺀질거리는 미소를 머금고 나타난 것에 그녀는 꾸욱 주먹을 말아 쥐었다. 분노에, 주먹 쥔 손이 빠르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