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그림책

남은 10cm의 용기가 있었다면 3

 아힌 2015. 8. 10. 00:42



한 학기를 보내면서, 릿카는 문득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곁에 누군가가 있는 것이 불편하지 않고 퍽 자연스러울 정도로 타인이 곁에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타인, 타케다는 그녀의 곁으로 녹아들었고, 그녀 또한 그의 곁에 녹아들었다.

 

고개를 돌리면 있는 그, 또는 그녀가 없는 날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라서. 그녀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뻣뻣하게 굳은 혀가 뭉뚱그린 단어를 문장으로 나열해 간신히 뱉어냈다.

 

 

"있잖아 테츠."

 

"?"

 

"우리 사귈래?"

 

 

아마도 그 날은. 스친 바람에도 나뭇잎이 숨을 죽일 정도로. 그렇게 우리는- 조용히 서로의 눈만 마주 보고 있었던 날이었다고. 그렇게 그녀는 생각한다,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나선 길은 위태로이 이어졌다.

 

밤새 이케부쿠로에서 미야기까지 달려 와준 신라와 세르티 덕분에 이자야의 상태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호전되었다, 일단 상태는. 일단 육신의 상태는.

 

육신의 상태는 호전되었지만, 문제는 이자야가 친 사고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유명한, 어떤 의미론 악명 높은, 악질적인 그 시부야의 정보 상인 오리하라 이자야가 작정하고 친 사고였다. 앞의 현란한 수식어구만 봐서라도 그 사고의 뒷수습이 탈 없이 완벽하게 되기 전까지 이자야는 그 콧대 높은 자존심을 숙이고 몸을 낮춰야 했다.

 

까지가 신라가 심각한 얼굴을 한 채 릿카에게 한 말이었다. ‘고비는 넘겼어, 이제 괜찮을 거야같은 단순한 말을 생각했던 그녀에게 쏟아진 것은 상상 그 이상의 것이었다. 무려 저 이자야에게 단련된 천하의 릿카도 감당 못 할 정도로 스케일이 컸다. 그녀는 신라에 이어 더 상세한 정보를 정리해서 말해주는 세르티에 그저 조용히 그 모든 걸 듣고 있을 뿐이었다. 가만히 듣다가 이야기가 다 끝난 후에 그녀는 기가 막혀 헛웃음은 무슨, 그저 허허로이 웃음을 흘리다 이내 정색했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차가움으로 무장한 그녀가 나즉히 원인제공자의 이름을 읊조리니, 그 시선을 받아야 할 당사자의 몸이 움찔거렸다. 부러 잠든 척 딴청을 부리는 모습에 참지 못하고 호되게 쪼아 얻어낸, 그러니까 신라와 세르티가 모르는 더 상세한 앞뒤 정황과 현재 상황 정보들까지 전부 듣고 난 이후에야.

 

릿카는, 아주 깊은 빡침과 함께 분노를 담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 그래. 일단은 시즈오가 얽히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구나.”

 

 

그 녀석도 엉켜 있다고 했으면 사촌이고 친구고 나발이고 너희들 다 밖으로 던져버릴 뻔 했어. 호호호 웃으며 하는 말에 담긴 가시가 제법 뾰족해서 이자야는 쇼파에 더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리고 이어서 릿카의 성격상 후반부에 가서 터질 잔소리에 대비해 일단 귀 언저리에 손을 올려놨다.

 

동시에, 그녀의 웃음이 사라졌다.

 

 

정말, . , 네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짓을 했는지 알고나 있는 거야!”

 

 

벼락같이 내리치는 음성에 가득 담긴 걱정과 질책에 입술을 비죽이며 나 모르쇠로 일관하던 이자야도 찔리는 구석이 있기는 한 모양인지, 그저 풀이 죽은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릿카는 더 쪼아봤자 나올 것도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녀의 사촌은 해괴한 취향과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분명 천재고 비상한 머리와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동보다는 악동에 가까운 녀석이다 보니 이래저래 비밀이 많았다. 가족 중에서 유독 아끼고 사랑한다고 해서 그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허락된 그의 허용 범위는 딱, 이 정도까지였다.

 

 

하여튼, . 여기서 있을 동안 사고는 치지 마. 알았어?”

 

-, 네이.”

 

 

뒷수습이 깨끗하게 정리되기 전까지 이자야는 도쿄 쪽으론 얼씬도 안 하는 게 좋다 -라는 결론 하에 릿카는 그녀의 소중한 러브 하우스의 한켠을 내놓았다. 못마땅함은 일단 삼키고, 우선적으로 이자야의 안전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래나 저래나, 어쨌든 안과 밖으로 적이 많은 그가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곳이라며 다친 몸을 이끌고 온 것이 저의 집이란다. 모질게 내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사람을 사랑한다며 웃고 다니는 미친놈이요, 말썽부리기가 일상이고 사람 혈압 올리는 것이 특기인 사촌일지라도 어쨌든 가족 아닌가. 또 그 오리하라 이자야였다. 제 아무리 선 안의 사람이라고 해도 기대는 것은 차라리 죽고 말지, 그 고고한 자존심에 흠집 나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 녀석이 약한 소리를 내면서 안기는 것에 릿카의 마음은 사르륵 녹아내리고 말았다.

 

물론 저의 사촌의 머리가 매우 비상한 천재 놈이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에 대비해서 준비해놓은 구석이 없을 리가 없다는 것을 신라와 세르티가 돌아가는 길을 배웅한 그녀가 뒤늦게 떠올렸으나 이미 일사천리로 끝난 일이었다. 제멋대로인 저의 사촌의 집에 머물기를 원했고, 신라와 세르티도 그 의견에 동의를 했고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릿카, 그녀가 동의를 했다.

 

결국- 반박할 여지도 없이 아침 해와 함께 골칫거리를 맞이하고 말았다.

 

 

"는 이야기는 개뿔."

 

 

쥐어뜯은 머리를 다시 거칠게 쓸어 정리하면서. 릿카는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줘 몸을 바로 하고 허리를 통통 두드렸다. 말 그대로 아침이 되어 버렸다, 자지도 못한 채로 그 벼락같은 새벽 끝에 아침이.

 

 

나 출근할 거야. 너 그 자리, 그대로 자고 있어. 알았어?”

 

- 하암, 기운도 돌아서 푹 자고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구우, 릿쨩. 날 좀 믿어봐!”

 

우자야를 믿을 바에야 바퀴벌레를 믿고 말지.”

 

너무해!”

 

 

, 그래그래 앙탈 그만 부려. 손을 휘휘 저으며 귀찮다는 듯 일축한 그녀는 피곤에 찌든 몸을 추슬러 움직였다. 일단 해가 떴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7시도 안된 시점일 것이 분명했다. 시계라곤 저의 핸드폰 그 이하도 이상도 없는 그녀로서는 눅눅하게 늘어지는 몸을 추스르는 것도 바빠 핸드폰을 살필 여력도 없었다.

 

 

, 몰라 버스 타고 갈래.”

 

 

앓는 소리가 끄응, 퍼졌다.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한 정신으로 운전하다가 사고 낼까 겁이 나 걸어간다는 선택지를 고르긴 했지마는, 막상 준비를 끝마치니 자꾸만 손이 차키로 향했다. 망할 사촌은 색색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약간 창백한 얼굴이라거나, 계속 눈에 밝혀서 다시 한 번 앓는 소리를 흘린 그녀는 푸욱 깊은 한숨을 쉬며 가방을 뒤적였다.

 

 

하여튼 정말이지 이 원수덩어리.”

 

 

새하얀 손수건, 끝에 릿카라고 수가 놓아진. 그것을 깔끔하게 펼쳐 이자야의 잠든 얼굴 위에 덮어준 그녀는 두어번 소리를 내 합장하고는 이내 지갑 속에서 지폐 두 장을 꺼내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일단 일어나고 보면 무언가 먹이기라도 해야 하는데, 저 꼴로 주방에 들어가서 직접 차려 먹으라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마음이 여려서 그래, 중얼중얼 힘없이 입술을 달싹이며 스스로를 다독인 그녀는 이내 마무리로 종종 배달시키곤 했던 음식점의 번호와 그녀가 종종 먹곤 했던 메뉴 서너개를 적은 쪽지를 돈 위에 붙여두고는 집을 나섰다.

 

 

힘차게 집을 나선 것도 좋았고 버스를 타기 위해 서두른 것도 좋았다. 그나마 치마가 아닌 바지를 입은 것에 활동성이 강조된 것도 매우 좋았다. 그래, 다 좋았다. 단 한 가지의 생각 미스가 있었다는 것을 뺀다면 매우 좋은 선택이었으리라.

 

 

아윽.”

 

 

버스 정류장은 집 근처에 여러개가 있었으나, 그녀가 근무 중인 아오바죠사이로 향하는 버스가 지나가는 정류장은 딱 하나였다. 그리고 그곳은 그녀의 집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여기까지는 어찌저찌 이해하고 넘어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오늘. 꽤 높은. 힐을. 신고 나왔다는 사실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하던가. 어째서 자신은 이 높은 힐을 신었던 것인가. 더군다나 개시한지 얼마 되지 않아 길이 덜 먹은 힐이었다. 뒤꿈치에서 느껴지는 알싸한 통증에 오만가지 욕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으나, 그놈의 이미지가 뭐라고.

 

릿카는 입술을 앙 다물고 마저 걸음을 옮겼다. 통증은 계속해서 달라붙었다.

 

 

"-."

 

 

그래도 부임하고 나서 퍽 즐거운 출근길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짜증만 나는 게 안타까웠다. 덧붙여 학교까지 가는 길이 어쩜 이리도 멀게만 느껴지는 건지. 릿카는 피곤함에 늘어지는 몸을 추스르며 지갑에서 잔돈을 꺼내들었다.

 

 

-스가, 오네. -? , 저거네.”

 

 

점점 가까워지는 버스정류장과 다행스럽게도 버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익숙한 번호, 아오사이로 가는 버스다.

 

멀리서도 보이는 익숙한 교복의 모습에 그녀는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