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그림책

남은 10cm의 용기가 있었다면 1

 아힌 2015. 8. 10. 00:41



한 차례 수업이 끝나고 썰물이 일 듯 사람이 빠져나간 강의실에서 뒤늦게 움직이던 타케다는 저를 부르는 교수에 의아하며 앞으로 나갔다.

 

 

", 교수님-?"

 

", . 오리하라상이 요 근래에 수업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데 필수 과제가 있어서요. 정말 미안한데 타케다상이 전달해주면 안될까 싶은데요."

 

"제가요?"

 

 

여대의 특성이라고 해야 할까 대체로 여자가 많은 탓에 유일한 남성취급 받는 그가 신경 쓰여 부르는 것이겠거니, 그렇게 생각하면서 강단 앞으로 나간 그는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홉뜨며 느릿하게 깜빡였다. 오리하라상. 이 강의실에서 오리하라라는 성을 쓰는 사람은 오직 한 명, 그것도 첫날 그의 옆에 앉았던 유난히도 검은 긴 머리칼이 눈에 뛰었던 그녀. 오리하라 릿카, 이름이 독특해서 기억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 타케다는 교수가 건네는 과제 안내문을 받았다.

 

오늘 그가 받았던 것과 동일했다.

 

 

"이런 부탁하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오리하라상이 특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 . 장학생인데다가- 좀 신경이 쓰이긴 해서 그래요."

 

 

, 이게 특별한 취급인건가? 쓰게 웃으며 말하는 교수에 타케다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이곳은 그가 다니던 곳이 아니었고, 수업 간의 문제로 그의 대학이 아닌 몇몇 사람들과 함께 이곳에서 듣게 된 것 뿐이니 별 불이익은 없었다. 애초에 평가는 그의 대학에서 개별적으로 시행할 것이니 애써서 이 행위가 부당하다 항의할 이유가 없다는 소리.

 

다만.

 

 

"그런데 어째서 저를?"

 

 

남자인 자신보다는 여대생들이 더욱 친숙할 텐데, 는 부당하다는 소리가 나오고 반박이 나온다 한다고 쳐서 무리라곤 하지만 교차 수업을 듣는 것은 타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교차 수업을 듣는 여타 다른 남학생들도 있었는데 어째서 콕 집어서 자신을?

 

타케다는 머뭇거리면서 내밀어진 종이를 마음 편히 잡지 못했다.

 

 

"알고는 있겠지만, 이 수업은 2학년들부터 들을 수 있는 수업이죠. 예전부터 전통이라고 해야 할까 1학년들 중에서 신청자들을 받아 테스트를 통해 선별해 청강을 허락하고 있었지만 올해엔 청강 허락받은 학생이 오리하라 상밖에 없어서 그런지 학생들끼리 잘 어울리지 못하더라고요. 솔직히 놀랐어요. 오리하라상, 다른 남학생들과 대화 하는 모습을 한 번도 못 봤던 거 같은데 전에 보니까 타케다상과는 좀 얘기를 나누고 해서 이렇게 부탁하게 된 거에요. 뭔가 말이 길고 그래서 변명 같지만 믿고 있으니까, 부탁할게요."

 

"알겠습니다."

 

 

저런 말까지 들었는데 거절할 정도로 타케다 잇테츠란 사람의 성정은 모질지가 못했다.

 

 

음료가 나왔습니다, 란 그 말 한마디에 침묵이 무너졌다. 서로의 음료수를 배분하고 목을 축이는 시간을 가진 후에 릿카는 빨대를 한 번 휘저어 얼음들이 찰캉, 맞물리게 만들었다. 둘 밖에 없는 카페 탓인지 소리가 꽤 크게 울렸다.

 

 

"그동안."

 

"?"

 

"그동안 잘 지냈나봐, 테츠는."

 

"그럭저럭 지냈지 뭐."

 

"지금은 어느 학교야? 전엔 모교였잖아."

 

"카라스노에 부임중이야."

 

"그렇구나."

 

 

한 번 쭈욱 들이키니 입안에 달콤 쌉싸름한 맛이 화하게 퍼져 가득 찬다. 꿀꺽, 부드럽게 그 액체를 삼키고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면서 그녀는 살짝 빨대 끝을 깨물었다. 자꾸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혼란이 온다.

 

 

"릿카는."

 

"?"

 

"릿카는, 어디로 갔어?"

 

 

문득 릿카는, 밑으로 떨궜던 시선을 들어 올리며 타케다를 바라봤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떨어진 그는 어딘가 긴장한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왜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냥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나오고- 동시에 편안함을 느꼈다.

 

 

"푸훗-."

 

"릿카?"

 

"아니, 아무것도 아냐. - 아오바죠사이에서 부임중이야."

 

 

웃음 때문에 눈가에 괴인 눈물을 아무렇지 않게 닦아내면서 오리하라는 타케다의 질문에 조금 늦게 대답했다. 앞에 놓인 커피 잔을 손에 쥐니 손바닥을 통해 차가운 기운이 살금살금 다가왔다. 어딘가 들뜬 기분을 그렇게 다독여 수그리면서. 그녀는 부드럽게 웃었다.

 

 

"아오바죠사이라면-."

 

"내 어머님의 모교. 전에 말한 적 있지?"

 

"아아. . 들었었어."

 

"작년 입학식 하면서 왔는데, 내가 듣던 거랑 지금이랑은 많이 다르더라."

 

"그렇지. 무려 20년은 넘었잖아. 근데 학교란 건 금방 변하는 것 같더라. 저번에 모교에 부임했을 때, 많이 달라졌더라. 고작 5? 그 정도 밖에 안 지났었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5년이란 시간 앞에 고작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그에 잠시 멈칫했던 그녀는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5. 고작 5년이란 말이 어딘가 서늘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그녀와 그가 헤어진 지 어느덧 6년이라고, 릿카가 말할 때. 타케다는 5년이란 시간을 고작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같이 했던 3년 동안은 과연 어떤 말로 표현이 될지 궁금해졌지만, 또한 한 없이 무서워져서. 그녀는 그저 조용히 마음에 묻었다.

 

 

"오늘."

 

"?"

 

"오늘, 여기서 널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우연이네, 나도 그랬는데."

 

 

또 다시 멈칫, 예전부터 조심스럽게 말하지만 그 안에 자신의 뜻을 확실하게 담아 전하고 했던 사람이었던지라. 릿카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곤 자꾸만 빨대 끝을 깨물면서 커피를 홀짝였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달달하게 씁쓸했던 커피가 이상하게도 단맛은 사라지고 쓴맛만 남았다. 한약처럼 깊은 쓴맛에 혀가 알싸하게 움츠러들었다.

 

 

"원래는 여기 나와야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같은 동료 선생님인데 그 분이 아프셔서 대리로 나온 거야."

 

"선 자리에 대리로?"

 

"? 소개팅이라고 하셨는데?"

 

"- 진짜 망할 우자야."

 

"?"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에 중간에 개입이 있음을 눈치 챈 릿카는 그래도 기특하다 싶어 보내지 않으려던 메일을 보내리라 다짐하면서 물고 있던 빨대를 놓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의아한 타케다의 얼굴에도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사촌의 제멋대로인 행동에 대한 것을 구구절절 이야기하기엔 이제 그와 그녀 사이의 거리가 꽤 멀었다.

 

, 멀어졌다.

 

 

"오늘 시간 괜찮아?"

 

", 으응."

 

"그럼- 나랑 같이 저녁 먹으러 갈래?"

 

 

턱을 괴고 웃으면서 톡, 빨대 끝을 때려 얼음을 휘저은 그녀는 마음 편히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타케다에 자세를 바로 하며 빨대를 물었다. 차르릉, 얼마 남지 않은 커피에 쌓여있던 얼음이 무너져 맞물리며 요란한 소리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