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10cm의 용기가 있었다면
평범한 초등학교 생활을 보내고 여중, 여고, 그리고 마무리로 여대까지 입학하고 나니 내 인생에서 이제 남자는 전부 아웃이겠거니 그렇게 여기면서 사는 것이 더 좋을 거라 비웃던 사촌의 머리를 후려치면서 대학교 신입생을 영위하던 그때 그 시절. 오리하라 릿카는 예상치 못한 습격을 받아야 했다. 바로 때 늦은 열병이 찾아온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대로 그 여파에 걸려 볼품없이 허우적거리기만 하던 그녀는 결국 유년기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강제로 주입당한 지식 때문에 앓았던 이후를 제외하곤 경험한 적도 없는 지혜열에 걸려 끙끙 앓으면서 자신의 병명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이 꼭 스물에 찾아온 그 첫사랑이란 무시무시한 열병은 늦게 배운 것이 더 무섭다는 말처럼 아주 무섭게 파도쳐 그녀를 덮쳤고, 그에 감기 한 번 잘 걸리지도 않던 그 튼튼한 몸으로 끙끙 앓기도 하고 비싼 돈 주고 들어간 대학의 청강까지 거부할 정도로 그렇게 말 그대로 사랑앓이를 하게 됐다.
처음엔 그냥 귀엽다고, 때 늦은 사랑의 열병에 허덕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나날이 새로워 보여 구경만 하며 즐기던 모 현의 정보상씨가 참다못해 그만 일을 저지르기 전까지. 오리하라 릿카는 마냥- 이 첫사랑은. 이 짝사랑은.
언젠가 사그라들고 갈 열병이겠거니, 생각하며 마냥 앓을 수밖에 없겠거니. 그리 여기고 있던 그녀는.
"─타케다 잇테츠라고 해요, 오리하라 상."
이마에 얹고 있던 해열패치가 삐뚜름하게 떨어지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당황감에 허우적 거려야했다. 눈앞에 있는 그녀의 열병의 원인 때문에.
*
일단 자리에 앉으라는 그 말에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타케다의 맞은편에 앉은 릿카는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가지런히 모은 치마 위에 조심히 올려놨다. 아무 말도 없이 시선을 피하고 있는 그녀와 그에 난처한 것은 중간에 끼인 점원, 어찌할 줄 모르고 안달복달 났던 그는 결국 울상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먼저 앉아 있던 타케다를 불렀다. 그에 그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일단 주문을 했다.
"카페라떼 따뜻한 걸로 한 잔, 아메리카노 시럽 없- 아니, 시럽 세 번 넣어서 아이스로 한 잔 주세요."
조신하게 모은 두 손으로 이자에서 벼룩으로 강등된 사촌에게 욕설과, 욕설과, 욕설과 저주가 가득한 메일을 보내기 위해 폭풍으로 자판을 두드리고 있던 릿카의 손이 멈췄다.
나이 스물에 만났고 스물 셋에 헤어진 이후로 만나지 않았으니, 거의 6년이란 시간이 사이에 그들의 있었다. 무려 6년이나 지난 후에야 만난 첫사랑. 스물과 스물아홉의 차이는 어마어마한데, 그 세월을 무색하게 만드는 그 단 하나의 발언에 애써 지으려던 웃음도 놀람으로 사그라든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당황하면 찬 것과 함께 달고도 씁쓰름한 아메리카노를 찾는 습관을 기억하고 있는 그에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놀란 마음을 애써 숨겼다.
쓰고 있던 메일은 살짝 떨린 손끝에 삐끗해 취소되었다. 어차피 임시저장 기능이 있으니까 그다지 신경 쓰이는 것은 아니니 넘기면서.
릿카는 그제야 핸드폰을 가방 안에 우겨넣고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테이블 위로 꺼내들었다. 대화를 할 준비가 되었다는 그녀의 또 다른 습관 중의 하나. 과연 이것도-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기대되는 마음은. 아직도 그 풋내어린 사랑이 선명하게 기억나고 있음에 그런 것이 아닐까.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응."
덤덤히 시작한 말은 분명 릿카, 그녀의 손이 올라간 것을 보고 난 이후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자상한 목소리로 부담 없이 이야기를 이끌고 있음에도 그녀는, 릿카는. 왈칵 치솟는 격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 조심히 타케다에게 고정했던 시선을 손으로 떨어뜨렸다. 움츠러든 손이 서로 맞물려 얽혀들었다.
"건강해보여서 다행이야."
"너도. 너도 건강해보여서 다행이야."
나 없이도 잘 지냈어? 다른 여자 안 만났어? 상대가 누군지 알고 선을 보러 나온 거야? 나인 걸 알고 있었던 거야?
머릿속에 맴도는 말들을 떨리는 손으로 차곡차곡 모아 결국 내뱉은 것은 아주 담담하게, 끝난 그 말. 둘 사이에 침묵이 스며들었지만, 어색함이 한 스푼 정도 있었을 뿐 그들은 오랜만에 편안함을 느꼈다. 둘이서 이렇게, 카페에서. 서로의 음료를 시키고 그저 조용히 침묵하는 그 시간을 좋아했던. 다시 돌아온 편안하면서도- 의지가 되는 그 시간을 맞이하면서 릿카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잔잔한 카페의 음악이 귀에 묻어나는 것이 아주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