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행

새벽 기행(紀行) 02

 아힌 2015. 7. 5. 04:01



태어나면서 소학교 졸업까지 지낸 미야기도 추웠지만, 고작 3년 하고도 반년? 아니지 정확히 10개월가량 지냈던 아키타의 추위는 뼛속까지 파고들어 잔상을 남길 정도로 잔인하게 추웠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잔혹하게 베어드는 그 추위에 잘게 몸을 떨다보면. 쌓인 눈 위에 남긴 눈물자국도, 짓이겨진 발자국도, 번진 핏자국도 현실감을 상실해버리고 말아서.

 

아아. 이건 꿈일지도 몰라.

 

짧은 희망의 말을 속살거리고 말더라. 바보스럽게도. 눈앞에 흐드러진 자색의 꽃이 선명히 붉음에 물드메. 그것을 알면서도. 눈을 즈려 감으니 온 세상이 어둡게 변하더라.

 

*

 

오랜만에, 그러니까 약 4년? 아닌가, 초등학교 6학년 끝 무렵엔 거의 오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다. 그냥 4년이라 해야지. 여하튼 고작 4년이란 시간 속에 바스라지고 뭉개진 기억의 뚜껑을 열었던 것을 다시 덮었다. 엉망진창의 그 속에서 뒤적여 꺼낸 파편은 상상했더 것과 달리 너무도 볼품없어, 휙 던져 버렸다.

 

 

"어서와, 오랜만이지?"

 

"…네. 안녕하세요."

 

 

대략 4년, 그 언저리는 될 기간 만에 방문하게 된 하나마키의 집은 기억 속의 것과 다름이 없어서.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다 나를 반기는 하나마키 여사께 인사를 드렸다. 익숙한 자태로 인사를 받으시는 모습에서 아아, 그녀석이 종종 로드 워킹을 하다 무언가를 주워오는 구나, 하고 바로 알게 되서. 조금은 쓴 웃음이.

 

 

"아침 먹고 갈 거지? 거실에서 조금 기다리고 있어줄래?"

 

"─네."

 

 

거실, 쇼파. 머뭇거리는 것을 기가 막히게 눈치 챈 녀석이 늘 내가 앉아있던 그 지정석까지 잡아끌어 안내한다. 버팅기니, 억지로 어깨를 눌러 앉게 만드는 배려까지. 물론 그 손길이 조금 아파 날카롭게 손을 때리려 하니 맞기도 전에 그새 도망치더라. 작게 혀를 차고 있으니 품에 억지로 떠넘겨받은 하이얀 털의 몽글거리는 강아지가 손끝을 핥았다.

 

어쩐지 고양이가 핥는 것 마냥 따가웠다.

 

 

"기다리고 있어, 준비하고 나올 테니까."

 

 

싫은데, 튀어나간 말을 짓눌러버리듯 픽 웃는 얼굴이 얄밉다. 저 얼굴은 대놓고 네가? 라는 그 뜻을 담은 것이라서. 때릴까? 작은 고민은 주방에서 들리는 따뜻한 소리에 어쩔 수없이 사그라든다.

 

 

"네 주인은 정말이지 제멋대로라니까."

 

 

작게 몸을 웅크리며 쇼파에 몸을 묻으니 품 안으로 더 파고 들어오는 하얀 강아지. 제 주인을 닮지 않아 날카롭지도 않고 몽글거리는 것이 퍽 귀엽고 사랑스러운. 마치, 그때 진 제비꽃마냥- 온순한.

 

이어진 생각에 손끝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헛숨을 삼키고 조여 오는 심장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끌어 모은 무릎 사이에 머리를 쑤셔넣었다. 어둠, 그 아늑한 공간 속에서 오히려 더 선명히 피어나는 기억들에 질끈 감은 눈 사이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아니, 스며들었다, 아니- 떨어졌다, 한 떨기의 꽃이 처참히 뭉개져서.

 

 

"─라!"

 

 

시끄러, 시끄러. 닥쳐, 시끄러.

 

머릿속이 어지럽게 몰아친다. 불쾌하다. 진득하게 달라붙은 그 불쾌감이 늘어지면서 몸을 타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찝찝한 그것을 떨쳐내고 싶어서, 갑갑하게 목을 조여 오는 것이 불쾌해서. 억지로 잡아당겨 거세게 패대기쳐진 몸이 욱신, 욱신 아프게 울고 있었다. 짓눌려, 아니 눌러 찍힌 어깨가 꽤 아프다. 선명하게 기어 오른 통증에 감았던 눈을 뜨니- 그새 꽤 익숙해져버린 얼굴이 있지 뭔가, 우습게도- 거기에 안심하고 말아서.

 

새파랗게 일그러졌을 것이 뻔한 얼굴을 감추듯 편안하게 그려내면서 다물었던 입술을 살짝 벌렸다. 참았던 숨이 토해졌다. 공기가 부족해 오그라들던 폐부가 게걸스럽게 공기를 탐닉했다.

 

 

"…훌륭한 응급처치였어, 하나마키."

 

 

깊이 들이쉬고 다시 내쉬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빈정거리니 하얗게 질려 있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면서 무참히 일그러진다. 그런 그의 뒤로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정적을 가로 짓는다. 그제야 떨어진 손에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너의 뒤로 보이는 하나마키 여사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형용할 수 없는 불쾌한 착각을 그녀가 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어서. 더 사납게 널 밀쳐냈다. 그래봤자 망가진 '전' 선수의 힘이 얼마나 될까, 일반 계집의 힘조차도 낼 수 없는 내가 어찌 감히. 순순히 밀려나는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어 사납게 얼굴을 찡그리며 네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까 전의 그 강아지가 끼잉- 낑, 애달프게 울며 다가오더라.

 

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사랑스럽고 온순한 아이였다. 이름을 물었다, 어이없다는 눈길이 느껴졌지만 꿋꿋하게 무시하며.

 

 

"하아-. 하여튼 아사쿠라, 너는-. 쯧. 그래 스미레. 스미레다."

 

 

잘게 떨리는 눈을 그대로 비춰내는 강아지를 보면서 천천히 눈을 휘었다. 보이지 않게, 눈을 감추듯- 그렇게 휘었다. 하필이면 또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강아지였다.

 

분명 나는 이 녀석을 지금 이 순간 이후로 보지 못할 것임을 조용히 가슴 속에 묻었다.

 

 

언제였더라.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냥 내가 엄마랑 데면데면해지고 어색해질 때 쯔음에 이상하게 하나마키 여사는 나를 잡아끌곤 했더라. 그로 인해 저 망할 녀석에게 좋지 못한 말을 듣고 가시가 덕지덕지 붙은 말에 얻어맞아도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을 수 있더라. 그랬더라.

 

이 따뜻한 밥 한 공기, 따뜻한 관심 한 줌. 그게 전부였는데도 나는 이대로 이곳에 안주하고 싶어서, 그만.

 

 

조용히 밥을 다 먹고 나서, 젓가락을 내려놓고. 소맷자락을 걷어 올리니 무엇하러 손님에게 설거지를 주겠냐며 등 떠밀려 나왔다. 이제 곧 하나마키가 가는데 같이 가서 앞으로 다닐 아오바죠사이를 구경하고 오라는 하나마키 여사의 말에 그저 웃었다.

 

희미하던, 엷던 상관없이- 그저 일그러진 얼굴을 감추기 급급할 정도로 퍽 다급하게.

 

 

"엄마, 그러지 마요. 걔가 그대로 우리 학교 오면 나 피곤해져."

 

“어머, 얘는! 어릴 땐 그렇게 친했으면서! 아사쿠라군이 이젠 없다고 울고 그랬던 게 바로 엊그저께라구?”

 

"엄마!"

 

"─그랬어?"

 

 

비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위에서 아래로 훑으며 노골적으로 그리 물으니 와그작 일그러지는 얼굴이 퍽 볼만 했다. 이 정도 했으면 분명 이제 나가떨어지겠거니 그리 생각하면서 하나마키 여사께 인사를 드렸다. 따뜻한 밥 한 공기, 관심 한 줌. 언제나 상냥했던 그녀였기에. 꽁꽁 눌러놨던 과거의 파편이 슬금슬금 기어오르게 만드는 것만 없었다면 참 좋았을 테지만 그것이 욕심이란 걸 알기에 그저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고 그저 방긋,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었다.

 

눈칫밥은 익숙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