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행

새벽 기행(紀行) 12

 아힌 2015. 8. 10. 00:35



후에 잇세이에게 신고해서 당당하게 땡땡이 치고 있던 녀석을 돌려보내고는. 혼자 남은 시간이 적막해 멍 때리면서 유유히 보내고만 있다가. 슬쩍 퇴원 얘기를 입에 올렸다. 확률은 반반이었다. 들키거나, 혹은 들키지 않거나. 결과적으로 일단은 ‘무사히’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얼마 되지도 않던 짐을 순식간에 다 싸고는 퇴원수속을 차례대로 밟고. 여즉 팔에 꽂혀 있던 링거를 뽑아 정리하고. 옷까지 갈아입고 나갈 준비가 다 되어서야. 


그제야. 밖을 향해.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후-우.”



그렇게 나간 밤은 고요했다. 아니, 밤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5시 59분에 퇴원수속이 승인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시간상 저녁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거리는 어두웠다. 따사로운 봄이라고는 했지만, 지구 온난화인지 무엇인지 때문에 계절이 변화무쌍했다. 즉, 봄임에도 겨울과 같아서. 쌀쌀한 감이 있었고, 체감 상으로 낮은 짧았다. 밤은 길었다.


여하튼 더 있어야 한다나 뭐라나 그 모든 걸 뿌리치고 멋대로 퇴원수속을 밟아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지금쯤이면 보호자로 이름을 썼던 그녀에게도 연락이 들어갔을 때였고. 잇세이도 그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잇세이, 화낼지도.”



하지만. 그래도 결국 그 두 사람은 안부 전화도 하지 못하고 마냥 내일이 되기를, 혹은 다음을 기약할 것이었다. 그게. 조금은 우습고 슬퍼져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해가 지고 별빛이 내려앉은 거리는 어두컴컴했다.



집은 적막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부친과 모친은 기어코 작정한 모양이었다. 알음알음 소문이 있던 상황 속에서도 꽤 꿋꿋하게 버텼다고 생각은 했다. 


허나. 그러면 무엇 하나. 이미 현실은 빼곡히 적혀진 종이였다. 그들이 바라 마지않았던 하얀색 도화지가 아닌, 조금의 줄글이 있다고 할지라도 괜찮을 거라고 믿었던. 그런 종이가 아닌 새카만 종이였다. 온갖 추문과 사실이 난잡하게 어지럽혀진. 결국에 그렇게 더러워진 것 자체가 진실인. 그것이 현실이었고 진실이었으며, 동시에. 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도망친 모양이었다. 생물학적 아버지인 그와, 내가 지냈던 이 거리에서 도망쳐 다른 곳으로 간 모양이었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통도 크셔라.”



급하게 이사를 결정한 집, 하필이면 발작을 일으키며 입원을 해버린 나. 고작 하루여도 충분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예상하고 왔던 미야기, 하지만 예상을 넘어선 소문과 추문과 시선. 타인의 시선에 히스테리를 부릴 정도로 예민했던 새 엄마가 그것을 버텼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더욱이 욕심도 많았던 사람이니 내 어미를 떠올리게 하는, 아버지의 전 부인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속속 묻어나는 거리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진 않았으리라. 고작 하루, 그 첫날. 그날 그녀는 이사를 결심했다. 하지만 나는 진학을 원했고 이대로 있기를 원했다. 다만, 숨겼다. 그 모든 것을 구태여 말하지 않고 부러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나돌았다. 


그것이 그녀가 원했던 것이니까. 



“전, 화 해야겠지.”



나를 두고 떠난 두 사람. 분명 그 곳에서 둘은 재혼이라고 할지라도 이제 막 결혼해 풋풋한 신혼의 모습을 꾸밀 것이었다. 자식이 없으니 더 수월할지도. 일단 전화는 미루기로 했다. 조만간 전화해서 이 집을 처분하고 집 근처의 작은 맨션, 혹은 원룸을 구해달라 할 생각이었다. 그것을 원하고 있을 이들이니, 그렇게 해줘야지.


돈은 조금이라도 아끼는 편이 좋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안 그래도 가벼웠던 마음은 새털만큼 가벼워졌다. 귀찮으니 밥은 먹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정적인 집을 훑었다. 정말. 우습게도 사소한 가전제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 주방에는 냉장고와 전자렌지, 그리고 인덕션과 답지 않은 오븐이 있었다. 물도 나오고 전기도 통한다는 것에 안도했다. 다만, 텔레비전이 없어 킬링 타임은 힘들다는 걸 깨달은 순간 조금의 아쉬움이 있었다. 



“그냥, 일찍 잘까.”



아직 시간은 8시, 조금 이른 시간에 속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기에는 충분했다. 일찍 잠들까 고민한 순간 핸드폰에 생각이 미쳤다. 일단 꺼뒀던 그것을 다시 켜니 부팅에 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빤히 보다가 기다리니 곧장 전화가 왔다. 


녀석이었다. 받아줄까, 어떨까 고민하다가 그냥 받기로 했다. 



“여보세요.”



어디야, 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우습게도 녀석은 문을 열라고 했다. 반사적으로 굳게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니 조금 거친 숨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녀석이 한 번 더, 문을 열라고 했다.



“면회금지 시간인 걸 몰라서 묻는 거니.”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심드렁하게 말하니 쿵, 현관문이 흔들렸다. 녀석이 낮게 목소리를 깔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열어, 단호하게. 침묵이 흘렀다. 녀석도, 나도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싫어.”



그리고 조금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내가 내놓은 답은. 거절이었다. 



“열어, 하나! 야!”



쾅, 쾅, 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흔들렸다. 저 녀석, 배구를 하는 녀석이라 손을 아껴야 하는데도 미친 듯이 주먹질하는 모습에 덜컥 겁이 났다. 망가지면. 안돼. 망가지면, 망가지면- 가지고 있던 단 하나의 즐거움이 무너지면. 


손이 덜덜 떨렸다. 왈칵 겁이 났지만 이를 악물었다. 



“─나쁜 놈.”



그래, 좋다. 네가 이겼다. 긴 숨과 함께 내던진 말을, 아직까지도 전화를 끊지 않던 녀석이 들은 모양이었다. 미친 듯이 두드리던 것이, 소리치던 것이 멈췄다.



“왜, 여기 있는 거야.”



이겼다고는 했지만, 열겠다고 내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문으로 다가가 손을 얹고 이마를 기대며 여전히 끊지 않은 전화를 이었다. 



“마츠가와가 전화했어.”



문득. 아버지라면. 날 두고 떠날 정도로 그렇게 조급했던 사람이었다면. 아니 애초에 이 집을 팔 생각이 분명했던 사람이었다면. 날, 여기에서 지내게 했을 리가 없었다. 빨리 팔아야 했으니까. 결국엔. 어딘가에 나를 맡겨둘 생각이었다는 게, 정답이 아니었을까. 여기엔, 나라는 존재에게 무른 사람이 무려 둘이나 있었다. 한 사람은 전 아내였던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나와 반절의 핏줄이 똑같은 남매였다. 절대로 나를 거부할 수 없는 사람이란 걸 그 머리로 계산하고 이런 일을 행했을 것이었다.


우스웠다.


놀아나는 것은 지겹다고 했으면서도 나는 그 손아귀 위를 벗어나지를 못했다. 



“열어.”


“잇세이는?”


“네가 싫다고 했다며.”



느릿하게 깜빡인 눈이 멍청하게 허공을 헤집었다. 내가? 언-제? 아, 설마 아침에 그게 그건가. 사고는 천천히 느릿느릿하게 굴러갔다. 제대로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그렇게.



“그래서 네가 온 거야?”



그래서 너였나. 잇세이가 너에게 나를 부탁한 건가. 어째서? 어째서, 너는. 왜 그걸 거절하지 않았어? 네가 아무리 친근하게 대해도 결국에 너는, 날 싫어하는 사람이잖아.


내가. 네 공간에 들어가는 걸 싫어했잖아.



“그래. 엄마하고도 얘기 다 끝내놨어. 아빠야 뭐, 다음주부터 1년 출장이니 괜찮다고 했고.”


“…하.”


“열어, 하나.”



아사쿠라라고 부를 때와 하나라는 내 이름을 부를 때의 너는 달랐다. 신기할 정도로 달랐다. 전자가 부드러운 느낌으로 혀를 굴린다고 하면 후자의 경우에는 단호하게 잘라내듯, 강인하게. 단단하게 손을 붙잡고 안아주는. 그런 느낌이었다.


손이 미끄러져 잠금장치에 닿았다. 망설이던 손끝은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움직이며, 결국엔. 문을. 열었다.



“하나.”



잔뜩 땀에 젖은 너는 꽤 다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힐긋 내려 본 손은 붉게 달아오른 기색이 역력했다.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다. 푹. 숨을 내쉬면서. 결국엔. 그래. 나도. 인정한다. 단순하게 과거를 공유했다는 그 말 때문일까, 너와 잇세이는 내 안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안가.”



나는 네 뜻에 따라줄게. 나를 데려가고 싶어 하는 네 뜻을 따를게. 하지만 오늘 하루는, 그저 지금 쉬고 싶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냥, 이곳에서. 있을래. 



“─그렇게 해.”



거절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너는 쿨하게도 그러라고 했다.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 멋대로 안으로 밀고 들어왔더라. 기가 막혀 바라보니 문까지 꼼꼼하게 닫아 잠그면서. 욕실을 쓴다고 덤덤이 말하는 것에 기가 차더라.



“야.”


“너 이럴 것 같아서 대충 짐 챙겨왔어.”



가지고 온 줄도 몰랐던 짐을 턱하니 보이는 모습에 어이가 없더라. 멍청히 보고만 있자니 그제야 아직도 연결 중이던 전화를 끊는 모습에 퍼뜩, 핸드폰을 보았다. 전화, 끊자마자 부재중 전화 목록이 다시 떴다. 통화중이었던 탓에 부재중으로 돌려진 모양이었다.


잇세이, 잇세이, 잇세이, 그리고 스미레, 다시 잇세이.


느릿하게 깜빡이며 보다 이내.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