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야 3
소녀는 한 사람의 여인이 되었다.
*
아침, 이번에는 옆집 소년 마츠가와의 알람소리 대신 본능적으로 눈을 뜬 미츠키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긴 하품을 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니,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스스로 얻어낸 아픔에 잠시 눈을 찡그렸던 그녀는 이내 꿈틀거리는 몸짓으로 문을 향해 갔다.
“일어나기 귀-찮, 하암-.”
웅얼이는 소리는 꼭꼭 씹혀서 혀에 밀려 목구멍으로 굴러 떨어졌다. 문가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어쩔 수없이 일어나야 했던 미츠키는 엄청 꾸물거리는 몸짓으로 일어나서 힘차게 문을 열고, 종종 걸음으로 서둘렀다.
귀찮은 것은 귀찮은 것이었지마는, 그래도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다.
“일어났니?”
“네-에-.”
전날 미리 약속이 있음을 알리고 일찍 자리에 누웠던 그녀는 예상했던 대로 아침, 스스로 일찍 일어나 움직였다. 욕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구고 옷을 벗으면서. 그녀는 오늘 있을 일을 미리 생각하며 싱글싱글 웃었더라.
*
개운하게 씻고 축 늘어진 머리에 생기를 부여할 에센스를 바른 후에. 드라이기로 말리면서 바쁘게 움직이는 눈이 화장대 위의 화장품들을 살폈다. 평소의 가벼운 화장 혹은 선크림 + 틴트 조합의 단장이 아닌 화사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단장을 꿈꾸는 그녀의 눈이 곱게 휘었다.
“색은- 이렇게 할까나.”
단조로운 조합들이 아닌 조금은 포인트를 줄 수 있는, 그런 화장. 아이메이크업은 부러 단조롭고 또렷한 눈매를 부각시킬 수 있는 정도로만. 볼터치도 너무 색이 과하지 않게, 또 너무 혈색 없어 보이지 않게. 그 정도의 소량만. 마지막으로 입술은, 강렬한 머리색을 살릴 수 있도록 상큼한 색으로 촉촉하게.
계속 눈을 뗄 수 없는, 그런 모습으로 꾸미면서. 다 마른 머리에 드라이기를 정리해 치워두고 미리 예열시킨 고데기로 머리칼 끝에 가벼운 컬을 줘 단정하면서도 마냥 심심하지 않게.
오늘은, 그녀가 소개팅에 나가는 날이었다.
*
중국 혼혈이라는 꼬리표는 항상 고토 미츠키의 이름 뒤에 붙어 있었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올라선 키, 길쭉한 몸선, 또렷한 이목구비, 뭐 하나 똑같다고 할 수 없는. 도드라지는 외향 때문에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가 없었던 혼혈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녀에게 꺼림칙한 무언가를 주는 데에 망설이지 않았다.
“─아미, 너 진짜 미워.”
아득, 갈리는 잇새 사이로 사납게 짓이겨진 말이 쏟아져 내렸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풋내어린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았던. 그랬던 그녀가 대학교로 진학한 날, 3년이란 시간 동안 마음이 식어버린 남자친구는 등을 돌렸고 그녀 또한 자연스럽게 그를 잊고 다른 사람을 만났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그리고 다시 만나고 좋은 인연으로 헤어지고. 짧던 길던 결과적으로 언젠가는 헤어지던 탓에 좋지 않은 소문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런 쓰레기 같은 사람과 소개팅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식지도 못한 화를 풀며 미츠키는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만나자마자 여자에게 한 말이 소문 들었다, 진짜냐, 양다리한 적도 있다던데 지금도 그러는 거 아니냐, 나는 내 여자 공유할 마음 없다 같은. 천박한 말이라니. 그런 수준의 남자는 트럭으로, 아니 나라 하나를 준다고 해도 사양, 또 사양이었다.
“짜-증나아!”
단골 카페, 구석 자리에서 아메리카노와 함께 있는 화, 없는 화 다 풀어내던 미츠키는 이윽고 풀썩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애써 한 화장들, 머리가 다 흐트러지고 망가진다고 해도 지금의 그녀에겐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화가 풀릴 수만 있다면야.
“주문하신 치즈케이크 한 판 나왔습니다, 고객님. 대가리 좀 치워주세요.”
“말 좀 이쁘게 해줘라, 이래 보여도 VVVIP 단골 아니니?”
힘없이 늘어졌던 몸을 일으키자 조각 케이크가 아닌 말 그대로의 케이크 한 판이 나와 그녀이 앞에 차려졌다. 미리 셋팅되었던 포크를 들고 한쪽 귀탱이를 잘라 먹으면서. 그녀는 슬슬 입안에 퍼지는 즐거운 치즈의 맛에 점점 쳐져 있던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즐거움이 순식간에 자라났다. 역시, 기분 나쁠 때는 단거야. 단호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그 앞에 앉아있던 카페, 마가리타의 주인 사토 료코는 턱을 괴었다.
“또 무슨 일인데?”
“─개새끼 만났어.”
그저 덤덤히 말하는 것치곤 짓는 미소가 퍽 씁쓸하다. 사토는 그 말을 끝으로 계속해서 케이크를 먹기만 하는 미츠키를 보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조용히 칵테일 한 잔 내주고 미리 마츠가와에게 언질을 해둬야 할 듯 싶었다. 다 취하고 나면 알아서 시간 맞춰 데려가겠거니. 그녀는 지금 당장 가능한 칵테일의 재료들을 추렸다.
*
어느덧 중천의 해는 조금 조금씩 기울어 서쪽으로 반은 몸을 숨길 때쯤에. 치즈케이크를 안주 삼아 막 세잔 째의 깔루아 밀크를 다 마신 미츠키는 깊은 숨을 천천히- 길게, 내쉬었다. 워낙 사람 보는 눈이 없는 아미가 물고 온 소개팅이니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애초에 그냥 딱 잘라 거절할 것을, 괜히 좋다고 들떠서 기분만 나빠지고 이게 뭐람. 미츠키는 우울해지는 기분에 애꿎은 케이크를 쿡쿡 찔러가며 괴롭히다가 푹 숨을 쉬며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적했던 거리는 어느새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간간히 교복도 보이는 걸 보아하니 분명 학생들의 귀가 시간이겠거니. 그리 생각하던 찰나에. 익숙한 무리의 교복들에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미츠키는, 눈이 마주쳤다. 바람에 흐트러지는 은발 사이로 보이는 그 눈이, 유난히 도드라지는 눈물점에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싶었을 때에. 친구들에게 무어라 말을 거는 듯한 모습에 시선을 거두고 남아있던 케이크나 마저 괴롭히던 때에. 딸랑, 문소리가 들렸다. 미츠키는 딱히 누가 오건 말건 신경써줘야 할 만큼 사토의 가게가 못 팔리는 것도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구태여 고개를 들지 않고 턱을 괸 채로 콕콕, 케이크를 찔렀다. 오랜만에 본 모교의 교복이 퍽 머릿속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 안에 있었던 추억들도 새록새록 꽃 피어났다.
“오랜만이에요, 고토 선배.”
멀리, 밀려 있던 기억이 달려드는 것에 조금 멍하니 있던 미츠키는 앞에서 들리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아이였다. 방금 전 눈이 마주쳤던 그 은발의 아이. 그, 은발의- 꽤 즐겁게 해줬던 후배. 그녀는 성숙해지긴 했지만 1년 전의 앳됨이 간간히 보이는 여전한 얼굴에 픽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년만이지만, 뭐어. 그러게, 오랜만이네 스가.”
제법 당돌하게, 임자가 있던 그녀에게 고백을 하면서 좋다고 말했던 그 후배. 기어코 졸업식 날까지 찾아와 두 번째 단추의 행방을 당당하게 물어봤던, 바로 그 후배. 스가와라 코우시. 미츠키는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후배의 모습에 즐겁게 웃으면서 조금 우중충했던 기분이 밀려나는 것을 느꼈다.
물론, 술기운은 아주 약간 여전했지만.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보고 싶어도 학교에 영 찾아오시지를 않으셔서요.”
“에이, 졸업한 내가 가서 무얼 하니. 어차피 지금 테니스 부 해체됐잖아? 내가 마지막 기수 였었다는 걸 기억 못할까봐.”
“그래도 선배 팬들이 있었잖아요. 와서 손 한 번 흔들어주시지. 그랬다면 좋아했을 여자 애들 한 둘이 아니었을 걸요.”
기분 안좋은 일이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기분 좋아지는 아부를 살글살금 부리는 스가에 오랜만에 소녀 같은 꺄르륵 웃음을 터트리면서. 미츠키는 너무 웃어 눈가에 매달린 눈물을 살짝 닦아냈다.
“정말이지 스가는 예쁜 말만 해준다니까.”
“정말인데요? 저-도. 정말 좋아했을 텐데. 선배, 오셨다면.”
턱을 괸 채로 사르륵 웃는 모습에 쿵. 하고 떨어졌던 것은 무엇일까. 미츠키는 순간 바짝 마른 입안에, 몰려오던 술기운이 퍼드득 날아가는 기분을 느끼면서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모르는 척 말꼬리를 틀었다. 그럼에도. 결국엔 다시 돌아와서.
“선배.”
“으응?”
“지금은 곁에 지키는 사람 없죠?”
웃음기를 거두고 퍽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 눈동자는 지는 노을에 물들어 참 예쁜 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