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lous

그 여자, 네가 모르는 上

 아힌 2015. 8. 9. 19:03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었다. 이름이라거나 생긴 외향과 상관없이, 빛나는 사람이었다. 어디서건 중심에 설 수 있는, 그런 사람. 상냥하고 또 다정해서. 또 강인해서. 또 의지할 수 있게 든든한 사람이어서. 여러 가지 이유가 쏟아져 내렸지마는 그것들을 한 곳에 모으고 나면 결국에 남는 것은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조금은 무서워. 너를 다른 사람에게 뺏길까봐.

 

 

코즈메 켄마의 일상은 단조롭다.

 

아침, 기상을 도와주는 쿠로오의 손을 잡고 아침을 먹고. 등교를 하고 같이 배구부로 향한다. 아침 연습이 끝나면 쿠로오가 2학년 교실에 먼저 들러 켄마를 데려다주고 3학년 층으로 향하고. 이후 점심시간까지 간간히 수업에 집중하고, 쉬는 시간엔 게임을 하고. 혹은 사람을 관찰하고.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가방 속을 뒤적여 간식이 빠진 도시락을 챙겨 총총 걸음으로 교실을 벗어난다. 가끔은 3학년이 일찍 끝난다면 계단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쿠로오네와 합류하거나, 혹은 그들이 오기 전까지 기다리거나. 그렇게 식당에 모여서 점심을 간단히 먹고 얘기를 나눈다거나 혹은 체육관에 잠깐 얼굴을 비춘다거나.

 

점심 이후, 오후의 수업은 나른하기 때문에 적당히 딴 짓도 하면서 수업을 듣고, 졸고, 게임을 생각하거나. 그렇게 무의미하게 보낸 시간의 끝은 항상 부활동을 위한 체육관으로의 이동. 같은 학년의 시끄러운 야마모토와 함께 체육관에 가면 그녀보다 앞서, 혹은 늦게 쿠로오가 체육관에 온다. 부활동은 단조롭다. 매니저라곤 하지만 사실상 별로 하는 일은 드물어서. 게임을 하다보면서 생긴 분석력을 이용해 이것저것 일을 하고. 나중에 드링크를 가지러 온 쿠로오와 함께 부원들에게 각자 드링크를 배부하고 나면. 대충 그 날의 일은 끝이 난다.

 

나중에 마무리 운동을 하는 쿠로오를 두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 어느새 해는 기울어져 늘어진 그림자가 그녀를 반기는. 함께 하는 하교, 저녁, 그리고 잠깐의 이야기와 숙제를 하는 시간. 간혹 밤새서 게임을 하려고 해도 귀신같이 눈치채고 게임팩을 가져가버리는 쿠로오 때문에 잠자리에 들 수밖에 없는.

 

딱 그 정도의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상.

 

 

쿠로.”

 

 

그러니까. 그녀의 일상은 언제나 절반 이상이 검은색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물고 다니는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한다는 것이었다.

 

 

켄마. 많이 기다렸어?”

 

별로.”

 

 

힐긋 올라선 시선은 다시 내려와 게임기로 향했다. 화면은 다채로운 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잡한 캐릭터 도트라거나 일러스트라거나. 그럭저럭 중박 정도 쳤다고 무난하게 평가받는 게임, 그것이 그녀의 손 안에서 현란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래봤자 앞으로 이틀 안이면 다 클리어 되고 구석에 쳐 박히게 될 것이 뻔한 게임이었지만.

 

 

에이, 많이 기다렸네.”

 

 

히죽 웃는 얼굴은 어딘가 짓궂기도 하고, 얄밉기도 해서. 켄마는 곧장 얼굴을 찡그렸다. 정색하는 수준까지 갈만큼 불길한 웃음은 아니었으니 그 정도로 그쳤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서. 쿠로오는 곧장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리며 항복 선언을 했다.

 

힐긋, 그런 그를 자연스럽게 올려다보면서 노려보는 것까지 적당하게 한 다음에야 켄마는 나긋한 걸음을 서둘렀다.

 

 

저번에 미루고 가지 못했던 게임을 사러 가는 길. 지하철은 여러 학교의 하교 시간과 맞물려 지옥을 연상케했다. 귀찮은 것도, 사람도 싫어하는 그녀로서는 최악의 조건이나 다름없어서. 차라리 평일보다 주말에 나오는 것이 더 편했을 것이라 차오르는 불만을 삼키지 않고 온전하게 드러냈다. 그런 켄마를 감싸듯 서 있던 쿠로오는 귀찮음과 짜증이 덕지덕지 붙은 투덜거림에 킬킬 웃음을 터트렸지만, 얼마가지 않아 정확하게 명치를 가격하는 손길에 낮은 기침과 함께 침묵했다.

 

 

켄마, 다음이야.”

 

알아.”

 

 

다행스럽게도 켄마가 애용하는 가게는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서. 두 사람은 꾸역꾸역 밀려드는 인파에서 벗어나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으으, 평일의 이 시간엔 정말 너무들 한다 싶다니까.”

 

쿠로.”

 

잠깐만 켄마.”

 

 

영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고 고개를 돌려보곤 하던 쿠로오는 이내 늘상 그랬던 즐거운 얼굴을 지으며 켄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딘가 불만스럽게 그것을 내려보던 켄마는 이내 손이 아닌 그의 옷자락을 잡는 것으로 마음을 바꿨다. 팽팽하게 당겨져 찢어질 것 같은 아슬한 소매에 쿠로오는 웃는 모습 그대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지만 이미 토라진 고양이의 마음을 손 쉽게 풀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불만스러웠지만 그는 일단 켄마의 뜻에 따랐다.

 

 

켄마, 넘어져.”

 

쿠로.”

 

 

느릿하게 깜빡이던 눈은 웃고 있었지만 들썩이는 눈썹은 그리 좋은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어서. 평소라면 이쯤에서 얌전히 손을 잡고 차라리 고개를 돌리거나 말을 하지 않는 식으로 그의 속을 썩이던 고양이가 오늘따라 고집을 부렸다.

 

 

위험하대도.”

 

 

게임기에 고정되었던 시선이 빤히 올라왔다. 저를 보는 새초롬한 금색의 눈동자는 믿고 있으니까 괜찮아, 같은 식으로 말하고 있어서. 쿠로오는 터질뻔한 헛웃음을 애써 삼키면서 끄응,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의 고양이는 토라진 것이 아니라.

 

 

쿠로, 표정 기분 나빠.”

 

어라, 너무한 걸?”

 

 

온전히 너를 믿고 있으니까. 라는, 뜻에 의한 편리함이어서. 어찌저찌 참아내고 있는 입술 사이로 비식비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괜찮아, 쿠로니까.”

 

 

그러니까. 켄마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싱그러이 눈웃음을 지었다. 저의 나른한 검은 고양이가 어서 빨리 위험하지만 나른하게 아양을 떠는 흑표범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숨겼다. 마법의 주문조차 꼭꼭 씹어 삼켰다.

 

적어도 오늘은 게임을 사야 했고 그것을 실행해야했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머리는 좋다니까.”

 

싫어?”

 

 

동그란 눈매가 뾰족하게 올라서서, 새초롬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모든 걸 꿰뚫는 것처럼 정직했다. 쿠로오는 고개를 흔들었고 그가 그럴 것임을 알고 있었던 켄마는 그저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래도 역시, 이거- 내 손을 잡았으면 해서.”

 

 

기르는 고양이가 원체 사랑스러워서 노리는 사람들이 많거든. 소매를 잡고 있던 손을 억지로 풀러 내고 당겨 그 안에 코를 콩하고 박은 다음에야. 쿠로오는 저의 품에 쏙 들어찬 켄마의 귀에 조금 사납게 속삭이며 눈을 마주쳤다. 켄마가 검은색 흑진주와 같다고 누누이 말하던 그 눈이, 속내를 감추고 의뭉스럽게 휘었다. 그래봤자 이미 다 알고 있는 속이었지마는. 부러 모르는 척 하면서. 켄마는 그저 나른하고 지루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여태까지 손에 들고 있던 게임을 눈에 가득 담았다.

 

 

켄마 이것 봐, 이거.“

 

아직 안 도착했잖아.”

 

 

조르는 소리에 단호하게 자르면서. 켄마는 여전히 게임에 눈을 고정한 채였지만 턱을 붙잡고 들어 올리는 손을 벗어날 수 있는 재간은 없었다. 결국 열심히 하던 게임은 Game over라는 글씨를 화면 가득 채웠고 쿠로오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켄마의 고개를 휙휙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겨우 그가 바라던 곳에 닿았다.

 

 

귀찮아.”

 

 

커플 게임, 이라는 안내 홍보를 보자마자 켄마는 그나마 표정이 있던 얼굴에서 싸그리 감정을 몰아내고는 정색한 채로 쿠로오를 올려 보았다. 그녀의 유리구슬처럼 반질거리는 금안에 잔뜩 기대하고 있던 그는 긴 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숙였다.

 

 

, 너무하네.”

 

빨리 가자니까. 나 피곤해.”

 

네네, 알아 모시지요 여왕님.”

 

 

삐죽 튀어나온 입술과 조금은 토라진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와 말투에도 켄마는 꿋꿋하게 쿠로오가 날려 먹었던 게임을 다시 불러와 공략을 시작했다.

 

 

최근에 게임 판매점과 굿즈 상점이 통합되면서 생긴 문제점 중의 하나는 게임이 좋아서가 아니라 단지 굿즈만을 위해서 온 방문객들의 불편함이 아닐까. 하필이면 켄마가 다니는 판매점은 굿즈와 게임이 코너가 나뉜 것이 아닌 적절하게 섞여있는 배치였다. 보기에는 좋았지만 실용성은 극히 낮았다. 그녀가 게임을 고르고 싶어도, 굿즈를 찾는 쪽으로의 오해 및 잦은 충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러 쿠로오를 대동하고 나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늘도 또 불편한 만남을 겪어야 했다.

 

 

쿠로. 웃지마.”

 

 

실컷 웃고 나서야 그녀가 원하던 게임을 찾아와 굿즈코너에 있던 어느 무례한 소녀떼로부터 구출해내는데 성공한 쿠로오는 저를 사납게 바라보는 시선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이인데, 부러 신경을 써줄 필요가 있냐는 뜻을 담은 제스쳐였지마는 켄마에게 있어서 싫은 것은 싫은 것이었다